仁者樂山[등산]/백두대간

아! 백두대간-2번 째 코스 2(도래기재-화방재)

지평견문 2012. 8. 19. 21:18

       < 아! 백두대간-2번 째 코스 2(도래기재-화방재) >


       부제 : <새로운 지평을 열다 - 백두대간 첫 구간 시작(김세봉)>

  
   * 날짜 : 2009년 7월 22일(수)
   * 참석자 : 송재혁(지산), 오진탁, 정재민, 김세봉
   * 약 25킬로미터 
   * 소요시간 : 약 13시간

 

   새벽 4시에 기상하였다. 아무래도 어제 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자면 꼭두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지고 보면 엊저녁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든 것도 그런 배려에서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대충 씻고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역시 민박집에서 챙겨 준 도시락을 물과 함께 배낭에 꾸려 넣었다. 당초 출발 예정시간 보다 10분이 늦어진 5시 10분에 민박집을 나섰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주인장께서 운전대를 잡으셨다. 15분 뒤 우리는 도래기재 앞에 섰고 출발에 앞서 주인아저씨 앞에 통과의례와도 같은 포즈를 취하였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아침 이슬이 기분 좋게 발치에 차여 왔다. 얼마간 걷다가 앞서 가던 정교수가 발걸음을 멈추고 한 곳을 가리킨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장엄한 위용을 드러낸 채 우뚝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이름도 찬란한 금강송이란다. 그야말로 재목감으로 그만이었다. 잠시지만 오교수와 장자에 나오는 못 생긴 나무가 수명을 다하는 이치를 논하면서 자리를 떴다.

 

    안개가 자욱하여 앞의 사람과 조금만 떨어지면 그 모습이 금 새 사라지곤 하였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가운데 첫 번째 우리가 도착한 것은 구룡산(1345.7미터, 7시 54분)이었다. 갈 길이 멀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서둘러 가는 데만 급급했던 것은 아니다. 적당히 앉을 만한 곳이 있으면 우리는 각자의 배낭을 열어 준비해 온 간식을 들었다. 그 종류도 다종 다기하여 복숭아, 자두, 바나나, 포도, 오이 등 적지 않은 먹을거리가 선을 보였다. 하나 신기한 것은 이번의 산행 도중에는 절대 술이 한 방울도 선을 보이지 않았던 점일 게다. 오교수와 정교수가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때문인 듯싶었다.

 

    8시 30분쯤 고직령(1231미터)에 다다랐고, 그 곳에서 약 20분경이 지난 어디에선가 우리는 산 손님을 마주해야 했다. 조금 앞서 가던 정교수가 발걸음을 멈추고 서 있다. 이유인즉 멧돼지가 한 마리 길을 가로질러 뛰어갔다는 것이다. 지산도 그 모습을 보았다고 하는 데 난 그저 돼지 울음소리 같은 것을 들은 데 지나지 않았다. 산이 깊고 인적이 드물다 보니 말로만 듣던 산짐승들이 제법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럿이 동행하기에 망정이지 만일 혼자가다 그런 일을 겪으면 무서운 생각도 들 성 싶었다. 그래도 우리는 넷이나 되니 그나마 다행이지 않은가? 좀 뒤의 일이지만 얼마 후에는 지산이 꽃뱀(율무기)으로 여겨지는 뱀을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9시 5분경 곰넘이재에 이르렀다. 한자로는 웅현(熊峴)이라 하는데 이곳은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라고 한다. 마침 의자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목도 축이면서 역시 간식을 들어본다. 정교수로부터 산행 음식으로 바나나가 좋다는 사실도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이래서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배울 바가 많은 가보다.

 

   이제 신선봉(1280미터)에 올라 신선인 양 한 것이 10시 10분경이었다. 10여 분을 더 가니 묘가 한 기 우리를 맞는다. 그 높은 곳에 누가 묘를 썼을까를 놓고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다 불현듯 일식이 있을 것이라던 뉴스가 생각났다. 과연 조금 있다 우리는 60여 년 만에나 볼 수 있다는 일식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행운이라면 행운이랄 것이 구름이 태양을 훑고 지나는 바람에 눈부신 빛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어 육안으로 보는데 아무런 지장을 느끼지 않았다. 우리가 행운(幸運)인지 그 구름이 행운(行雲)인지 하여간 기막힌 조화였다. 옛날 같으면 구름은 임금(태양)을 가리는 간신에 곧잘 비유되었는데 이렇게 구름은 때로 충신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지산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종종 길을 잘못 드는 경우가 있다며 제대로 길을 잡아준다. 산행에 앞서 철저한 검토와 준비가 지산에게 느껴졌다. 내리막길을 조금 가다간 옆으로 휘어 돌고 다시 오르내리기를 수차례 반복되며 산길은 계속된다. 우리는 서로 일행이 되기도 하고 잠시 떨어지기도 하며 고즈넉한 산길을 즐긴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부르르 떤다. 포곡으로부터의 전신이다. 산행길이 바쁘더라도 잠시 멈추어 일식을 감상하라는 친절한 메시지다. 산중이라 연락이 좀 늦어졌나? 이미 지난 것을 보낼 까닭이 없잖은가? 하여간 고마운 마음에 답신을 보내고 이내 앞사람을 따라잡는다.

 

    일행은 11시 반경에 차돌배기라는 갈림길에 도달하였다. 차돌이 박혀 있었던 데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하지만 눈을 씻고 보아도 차돌로 여겨질 만한 돌은 보이지 않았다. 차돌은 어디가고 이름만 남은 셈이다. 조반을 일찍 먹은 관계로 적당히 배들이 고파오던 참이었다. 앉은 김에 아예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그 때 지산이 손님이 온다고 하며 우리가 올라온 쪽을 바라본다. 평소 지산이 곧잘 장난치던 생각이 들어 그냥 하는 소리이겠거니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사람이 보였다. 어제는 산행 기간 내 한 사람도 만난 일이 없었고, 오늘도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고 보니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는 그렇게 사선(四仙)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점심 후에는 주변의 의자를 하나씩 점거하고 잠시 눈을 붙여 오수를 즐겼다. 잠시였을망정 나는 깊은 잠에 빠졌던 모양이다. 코를 골며 자더라는 오교수의 증언이 그것을 말해준다.

 

    약 한 시간가량의 점심시간의 여유를 뒤로 하고 우리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우리와 잠시 조우한 영주에서 왔다는 그 분은 벌써 점심을 마치고 떠난 지 한참 되었다. 깃대배기봉에 도달하기에 앞서 얼마간은 내가 앞장을 서서 조금 걸음걸이에 속도를 내보았다. 어쩌면 앞으로 다른 산군들과 백두대간의 일부를 소화해내야 할 것이므로 연습 삼아 앞서본 것이다. 그래서 깃대배기봉(1370미터)에 도착한 것이 1시 54분이었다. 일시에 수 백 마리의 잠자리가 전후좌우는 물론 위아래로 뒤섞여 날아오른다. 대단한 환영식을 받으면서도 도대체 이 많은 잠자리들이 어디에서 생겼는가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잠자리의 유충이 살 만한 늪지가 어디쯤엔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하였다. 10여 분 뒤 친구들이 도착하여 깃대배기봉 초석을 둘러싸고 앉아 휴식하며 간식을 들었다. 정교수가 꺼내 놓은 포도에 대해 태백산 천제단에 제물로 쓰자는 일부 주장도 있었지만 오교수의 떡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결국 그 달콤한 맛의 향연은 한 톨의 알갱이도 남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였다.

 

   깃대배기봉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우리 앞에 거짓말처럼 깃대배기봉 표지석이 앞을 막아선다. 앞서 만난 깃대배기봉에서 조금 더 올라선 것 같은 데 높이는 무려 2미터(1368미터)나 낮아지고 있었다. 최소한 둘 중의 하나는 잘못일 시 분명한데 어느 것이 옳단 말인가? 그나마 뒤에 만난 표지석이 산림청에서 세운 것인지라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자체 평가를 하기에 이르렀다. 산에서는 가끔 그런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한참을 갔다고 생각하는 데 길이 더 멀어지는 경우를.

 

    3시 15분경 우리는 태백산(→1.3킬로)과 부쇠봉(→0.4킬로)의 갈림길에 섰다. 세 친구는 나나 다녀오란다. 다수결도 아니건만 나는 그곳에서만은 알지 못할 이유에 의해 대표성을 띠어야 할 처지에서 오교수는 ‘그렇다고 꼭 가라는 것도 아니라’는 멘트를 남기기도 하였다. 갑자기 고라니로 보이는 네 발 짐승 한 마리가 부쇠봉 쪽에서 아래로 껑충거리며 뛰어간다. 오늘은 멧돼지부터 뱀, 고라니, 잠자리 등 산 친구들이 심심찮게 우리를 맴돌곤 하였다. 결국 혼자서나마 부쇠봉을 오르기로 하고 일행과 잠시 헤어져 길이 합류되는 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조금 서둘러 길을 재촉하였다.

 

    200미터쯤 오르니 그곳에서 태백산 쪽으로 길이 나 있다. 가까운 곳에 전망대와 주목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망대라고는 하나 하얀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가뜩 끼어 있어 전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깃대배기봉(첫째)을 올라설 때와 마찬 가지로 수많은 잠자리가 날아든다. 손만 들이대면 바로 움켜쥘 수 있을 만큼 이 번에는 수 천 마리 가량은 되는 것 같다. 자칫하면 발에 밟힐 정도로 길에 앉아 있는 잠자리도 적지 않았다. 마침내 부쇠봉 표지판(1546.5미터 : 3시 26분)을 확인하고 200미터를 되돌아 내려와 태백산 쪽 길을 택하여 부지런히 걸었다. 세 명의 친구가 나를 맞는다.

 

    태백산의 모습이 그 장엄한 위용으로 시야에 펼쳐지는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일군의 사람들이 이쪽을 향하여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분명 무슨 종교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였다. 지산이 잘 하면 막걸리 한 잔이라도 얻어 마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찬 말을 서슴없이 토해내어 우리로 하여금 군침을 돌게 하고 있다.  그런데 웬걸. 가까이 다가서 보니 그들은 인솔 교사로 보이는 몇몇의 어른들과 어린아이들이었고 복색도 노란색이었다. 그들은 강원도의 무슨 영재교육원에서 왔다는 어린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본 일도 없는 막걸리는 하얀 포말을 그리며 저쪽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순간이었다. 만일 그들을 가까이에서 만나지 못하였다면 우리는 처음 가졌던 생각을 거의 사실 가깝게 추억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내 눈으로 직접 보고도 사실이 호도될 수 있다는 증좌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확실히 모르면 말을 말아야 할 또 하나의 분명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알지도 못하는 남의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3시 52분 마침내 태백산 정상(1567미터)에 올라섰다. 안축(安軸)이 지은 등태백산(登太白山)시가 반갑게 맞이한다. ‘태백산에 오르다’라는 제목의 이 시는 그 내용이 좋아 원문 그대로 옮겨 놓으면 다음과 같다. 해석은 표지판을 따르되 자의대로 조금 손을 보았다.

 

    直過長空入紫烟(직과장공입자연)   긴 허공 곧게 지나 붉은 안개 속에 들어가니
    始知登了最高嶺(시지등료최고령)   최고봉에 올랐음을 비로소 알겠노라.
    一丸白日低頭上(일환백일저두상)   둥글고 붉은 해가 머리위에 나직하고
    四面群山落眼前(사면군산낙안전)   사면으로 뭇 산들이 눈앞에 내려앉았네.
    身逐飛雲疑駕鶴(신축비운의가학)   몸일랑 나는 구름 쫓아 학을 탄듯하고 
    路懸危磴似梯天(노현위등사제천)   높은 층에 걸린 길은 하늘의 사다리인 듯 
    雨餘萬壑奔流漲(우여만학분류장)   비온 끝에 온 골짜기 세찬 물 불어나니
    愁度縈廻五十川(수도영회오십천)   오십천을 굽이돌아 건널 일 근심되네.

 

   안축(1287~1348)은 고려 충렬왕과 충목왕 대에 활동한 문인으로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충혜왕 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를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등태백산’시도 그 무렵에 산에 올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무려 7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태백산을 보고 느끼는 정취는 비슷한 바가 있으니 태백산을 끼고 도는 백두대간의 길은 이렇듯 역사의 길을 통해 고금의 심정도 연결해주는 매력을 품고 있음에 어찌 탐을 내지 않겠는가.

 

    천제단 앞에서 오교수의 떡을 제수로 하여 잠시 배례를 하였다. 무속 인으로 보이는 어떤 여인네가 제수 및 무구 따위를 준비해 와 일정한 의식을 행하는 동안 바깥쪽에서는 인부들이 제단과 관련된 보수 공사에 한창이었다. 오교수가 준비한 쑥떡은 한꺼번에 먹기에는 제법 많은 양이었다. 지산이 구태여 나의 물을 먹겠노라고 물을 청한다. 등에 짊어지고 다니며 호스를 통해 마시는 물은 편리한 만큼이나 뭔가 꿀꺽 꿀꺽 마시는 시원한 기분은 느끼기 어렵다는 게 그의 변이다.

 

    4시 20분경 이제 태백산을 내려서기 시작하였다. 주변에는 볼 만한 주목들이 쭈뼛쭈뼛 고개를 내밀며 주목해주기를 갈구한다. 못 이기는 척 한두 장 그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보기도 한다. 그런데 웬 잠자리 떼가 또 그렇게 기승을 부리는지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올 정도이다. 수 천 마리는 되겠다고 하니 오교수가 정정을 해준다. 수 만 마리는 될 것이라고. 바로 그렇겠다고 수 만 마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어차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으니 뭐라 한들 확인할 길이 없잖은가? 그리 많은 잠자리가 이리저리 뒤섞여 교직한 채 각자 날면서도 어쩌면 서로 충돌하지 않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일부러 나무에 앉아 있는 잠자리를 놀래 켜 날려보는 것도 산 중의 한 즐거움이 되기에 족하였다.

 

    내리막길은 계속되어 유일사로 가는 갈림길(5시 5분경)에서 2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사길령 매표소를 향하여 발걸음을 떼었다. 이제 간식이라 할 간식은 거의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6시 7분쯤 태백산 산령각을 스쳐 지나갔다. 산령각 안에서는 무슨 굿을 하는 모양인지 알아듣기 힘든 주문 소리와 악기 소리가 귀를 때리고 손님으로 보이는 두 여인과 무당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지나쳐 내려오는 길에도 몇 사람인가 제수로 보이는 보따리를 바리바리 들고 힘겹게 언덕바지를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그들과 엇갈려 내려올 뿐이었다. 

 

    사길령 매표소(6시 21분)를 막 나서자마자 배추밭이 길을 막아선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길로 들어설 법도 하지만 지산의 용의주도함은 결코 길을 놓칠 줄 몰랐다. 배추밭 사이길 맞은편 길을 찾아내 우리는 다시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쭉길쭉한 낙엽송이 하늘을 찌르듯 벌려 서 있는 그 곳을 우리 네 명은 처음처럼 그렇게 막바지를 향해 무던히도 걷고 있었다. 그러다간 오늘의 종착지인 화방재[花芳嶺]가 의외란 듯 갑자기 활짝 시야에 전개되었다.(6시 32분)

 

    정교수가 사 준 음료수를 다 마시기도 전에 민박집 주인장이 오교수의 차를 앞세워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약 1시간 정도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 우리는 민박집까지 돌아왔다. 긴 여정에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잠시 눈을 붙여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도 했다. 민박집에서는 지산이 특별히 내는 저녁을 서둘러 축내고 이제 상경을 하게 되었다. 8시 40분쯤 출발하면서 길을 잘 안다는 이유로 정교수가 운전대를 잡았다. 우리는 처음 우리가 출발할 때와 역순으로 원주에서 오교수와 작별하고 내쳐 서울로 향하였다. 화양동 어디쯤에선가 지산을 내려주고 정교수는 친절하게도 피곤함도 잊은 채 용고 앞까지 나를 태워다 주니 그 고마운 마음씀씀이야 뭐라 감사해야 할 지 모르겠다. 집에 도착해 보니 시간은 무려 자정에서도 40여 분이나 지나 있었다.

 

    이번 코스에 참여 의사를 밝혔을 때부터 쌍수를 들어 환영해주었던 친구들, 같이 산행하면서도 내내 즐거움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친구들의 마음은 두고두고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내 어찌 감히 백두대간 산행 대열에 참여하는 엄두를 낼 수 있었을 것인가? 지금 자그마한 시작은 언제 이룰지 모를 목표를 향해 한발 한발 갈 수 있는 단초를 열었다는 데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져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