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 화방재 - 두문동재>
<백두대간 : 화방재 - 두문동재>
일행 : 송재혁(芝山), 오진탁(星巖), 정재민(巨谷), 김세봉
구간 : 화방재(강원도 태백시)-수리봉-만항재-창옥봉-함백산-중함백-은대봉-두문동재(싸리재. 강원도 태백시)
산행 시간 : 7시간 30분
산행 거리: 11.5km
2009년 10월 25일 일요일 맑음
엊저녁에 오늘은 좀 여유 있게 6시쯤 기상하여 식사 후 출발하자고 하였건만 난 4시 반쯤 잠이 깨었다. 깬 잠이 다시 들 리도 없고 그대로 누워 있자니 좀이 쑤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성암이 깰세라 조용조용히 일어났지만 결국 성암도 기척을 알아챘다. 좀 더 눈을 붙이겠다는 성암을 뒤로 한 채 여관에서 운영하는 목욕탕에 갔다. 아무도 없는 탕을 독차지하고 있자니 몇 사람이 들어온다. 목욕을 마칠 때쯤이야 거곡(정재민)도 언제 들어왔는지 같이 목욕을 한 사실을 알았다.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우리는 어제와 같은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한술 떴다. 도시락도 어제처럼 그 집에서 맞추었는데 인원이 늘어난 만큼 양만 조금 더 추가되었을 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제의 그 택시 기사 분께서 우리를 화방재 들머리까지 이동시켜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7시 30여 분쯤 본격적인 출발에 앞서 우리는 잠시 기사 분 앞에서 포즈를 취하여 기념촬영을 하였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거곡이 합류함으로써 인원수도 늘은 데다 출발 자체가 조금 여유로운 편이었다. 날도 이미 훤히 밝았기에 구태여 헤드랜턴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었다. 어제와는 판연히 다른 산행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어 다소 어렵기는 했지만 우리는 주변 환경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힘겹다는 생각조차 곧바로 잊어버렸다. 우측으로는 낙엽송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위용을 과시했고, 좌측으로는 형형색색의 단풍들이 날 보라는 듯 화려한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늘과 맞닿은 선이 산세의 외곽을 뚜렷이 형상하며 시야에 잔뜩 묻어나는 데는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성암이 스틱을 들어 가리키며 멋진 광경을 알려주지 않았어도 그냥 놓칠 경관이 아니었다. 산길에서 가다 쉬는 것은 비단 숨을 고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잡아끄는 그 무엇이 있을 때 바삐 가야할 길마저 망각케 하는 신비로움을 산은 가지고 있다. 거기에 산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햇볕의 향연은 음양의 차이를 보이며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아침의 신선한 기운이 몸을 휘감아오는 것을 적당히 즐기며 안개와 비 때문에 다소 차질을 빚었던 어제의 산행을 떠올리며 짧은 시간임에도 묘한 격세지감을 느껴본다.
첫 봉우리인 수리봉(1214m)을 올라서니 8시 15분이었다. 지난번 태백산을 내려온 길이 저쯤 되려니 가늠도 해보며 비교적 여유 만만한 산행이 이어졌다. 무성한 조릿대 사이를 가르며 뚫고 지나가노라면 밤새 온 몸으로 받아들였을 이슬방울 내지 빗물들을 툭툭 털어낸다. 옷깃에 적셔드는 물 기운이 차가운 듯 상큼하다.
때로 자신의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풍상에 생을 마감한 나무들이 길을 가로 질러 길게 누운 채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한다. 약간의 저항감에 안쓰러운 생각은 들지만 우리는 가야할 길이 있기에 한두 번 쓰다듬곤 이내 타 넘어가며 길을 재촉한다. 뒷사람을 위해 치우기에는 역량이 따르지 않고 뒷사람일지언정 그런 만남이 또한 산길을 걷는 또 하나의 달콤한 추억이 되어줄 것이라 위안을 삼는다.
한참을 걷다 보니 건물이 하나 앞을 막아선다. 국가에서 마련한 시설물로 보이는 데 그 담장을 감싸고도니 널찍한 임도를 따라 길 양 옆으로 황금빛도 찬란한 낙엽송들이 길게 도열해 있다. 지산의 지시에 따라 셋은 낙엽송을 배경 삼아 어줍은 포즈나마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만이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성싶었다.
낙엽송이 끝나가는 언저리에서 만항재가 우리를 반긴다(9시 15분). 이곳부터는 비교적 도로가 잘 나 있었지만 우리는 일부러 찻길을 버리고 숲길을 찾아 든다. 거곡이 건네 준 사과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해치우고 우리는 너무 늦을세라 다시 바로 또 앞을 향해 나아갔다. 성암이 나의 배낭이 뭔가 이상하다고 하는 소리에 거곡이 다가와 바로 잡아주며 배낭끈의 사용법까지 덤으로 가르쳐준다. 배낭이야말로 과학적 원리를 잘 활용한 케이스임을 조근 조근 설명하는 거곡에게는 역시 산군다운 농축된 경험이 물씬 배어나온다.
함백산으로 오르는 길은 수많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 발걸음은 조금 늦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친구들 꽁무니를 좇다간 앞에서 서면 나도 서고, 앞에서 출발하면 나도 같이 뒤따라가며 쉼과 가기를 누차 거듭하는 가운데 함백산도 한발 한발 다가섰다.
11시쯤 마침내 우리는 함백산(咸白山, 1572m) 정상에 올라섰다. 사방의 조망이 탁 트여 눈을 들어 바라보니 하이완 스키장, 사북고한 카지노, 만항재, 선수촌 등이 명징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정상임을 알리기라도 하듯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와 약간은 한기를 느낄 정도라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함백산을 내려서면서부터 오른 쪽으로 철망이 쳐져 있어 은근히 신경이 쓰여 조심하며 걷느라 그만큼 발걸음도 조금은 지체되었다. 스키장 개장을 준비하려는 지 철망 저 너머에서 스피커를 통해 시끄러운 소리가 귓전을 때려 다소 이마를 찌푸리게 하였지만 그래도 종종 볼만한 주목이 나타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살아 천 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나무이니 어찌 잠시인들 주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함백산과 중함백의 중간쯤 되는 곳에 도착했을 무렵 시간은 11시 반쯤 되었다. 아직 점심을 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간식을 들던 한 쌍의 부부와의 조우는 우리의 발걸음을 그곳에 묶어놓고 만다. 무심히 지나치는 우리에게 그들은 거부할 수 없는 말을 던져온 것이다. 막걸리 한 잔 마시고 가라는 그들의 소리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고나 할까,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우리는 그 제안을 기다렸다는 듯이 쾌히 수락했던 것. 그러다 우리는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격으로 그곳에 아예 자리를 잡고 그냥 눌러 앉아 점심까지 해결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웬일인지 평소 술을 즐기지 않던 성암마저 막걸리를 한 잔 청해 달게 마신다. 우리를 머무르게 한 부부는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우리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덕분에 우리는 점심을 먹기에는 천혜적인 장소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며 여유 있게 점심을 들을 수 있었고, 그러기에 널찍널찍한 돌로 이루어진 밥상은 너무도 훌륭하였다.
1시간 이상을 점심시간으로 보내고 중함백에 올라섰다간 다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어제 좀 무리가 되었는지 오늘은 싸리재(두문동재)까지만 가자는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거론되더니 결국 현실화되어 갔다. 처음에는 당초 계획대로 피재까지 가서 깔끔하게 산행을 마쳤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결국 무리를 하지 않기로 했다. 가끔은 뭔가 부족한 데가 있어 그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갈망을 갖게 되는 것도 분명 즐거운 비명이 될 수 있으리라.
자작나무군락지를 지나 은대봉(1442.3m)에 이른 것은 2시 반이 좀 지난 때였다. 지산의 말에 의하면 은대봉과 금대봉 일대에는 야생화가 많이 피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만항재를 지날 때 봄철 야생화축제를 알리는 플래카드를 얼핏 본 것 같기도 하다. 메뚜기와 비슷한 곤충이 여기저기서 폴짝폴짝 뛰어오르는데 깊은 산중에 메뚜기는 아닐 것 같건만 메뚜기와 너무 흡사해 대강 메뚜기 과쯤은 될 것으로 편리하게 정리해두기로 하였다.
중간에 샘이 있다고 하여 거곡과 함께 가보았지만 기대만큼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물의 양도 적으려니와 부유물이 떠 있어 물은 길지도 않은 채 그냥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주 급하면 모를까 구태여 먹어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였던 것이다.
3시쯤 마침내 우리는 두문동재(싸리재)에 내려섰다. 원래 우리가 가기로 했던 피재로 가는 길이 앞에 얄밉도록 구불구불 놓여 있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언제든 가야 할 길이지만 그쳐야 할 때 마땅히 그치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은 단지 산행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가 내려선 두문동재라는 이름이 왠지 심상치 않다. 여말선초 조선건국 과정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기치를 내걸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고려 유신들이 있다. 그들은 신정부인 조선에 협조하지 않고 두문동에 들어가 고려 신하로서 충절을 끝가지 고수했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그들을 두문동 72현으로 일컫곤 하는 데 사실 현전하는 72명의 이름이 기록에 따라 조금씩 다른 편이다. 72라는 숫자도 아마 공자의 제자 중 출중한 사람 72명이 거론되는 것과 견주어 인위적으로 맞춘 숫자는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이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말도 있다. 그 들 중 7명이 이곳으로 피난 와서 두문동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니 사실 여부를 떠나 두문동의 내력에 대한 설명은 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어제 우리가 지나온 건의령(巾衣嶺)의 유래를 낳은 주인공들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원래 일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택시 기사 분에게 연락하여 지산의 차가 있는 곳까지 이동하였다. 아침에 들어갔던 목욕탕에 다시 가서 고단한 몸의 피로를 풀었다. 졸지에 하루 두 번씩이나 목욕탕을 찾았으니 이만하면 나도 꽤나 깨끗한 척을 하는 셈이다.
상경 길에 원주휴게소에 들러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번에는 춘천으로 향하였다. 춘천에 둥지를 틀고 있는 성암을 먼저 내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막상 성암의 집 앞을 가보니 석사동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박사(성암)가 석사동에 산다면 이건 위장전입(?)에 속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춘천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 막힐 것이라 염려했는데 그런대로 잘 소통이 되어 그나마 생각보다는 빨리 서울에 도착하여 여유 있게 전철을 타고 귀가할 수 있었다.
이번 2박 3일간의 여정은 백두대간의 중간 허리를 하나 잇는 성과를 일구었다. 다음은 다시 따뜻한 남쪽으로 선회하여 지리산 자락의 고기리 지역부터 시작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또 기다려진다. 반백의 나이에 기다릴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을 함께 할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분명 복 받은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늘 말로 표현은 못하지만 가슴 속 깊이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것까지는 차마 숨기던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