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 중고개재 - 육십령 >
< 백두대간 : 중고개재 - 육십령 >
참여자 : 송재혁(芝山), 오진탁(星巖), 정재민(巨谷), 김세봉
구간 : 중고개재(경남 함양군 백전면)-백운산-영취산-덕운봉-북바위-민령-깃대봉 (구시봉)-육십령
산행 시간 : 약 9시간 10분(중식 및 휴식시간 포함)
산행 거리 : 17.39km
2009년 12월 27일 일요일 맑음(상경 중 눈)
어제보다 오늘 일정이 긴 까닭에 새벽 4시 반쯤 기상하기로 하였으나 30분 정도 먼저 일어나 간단히 볼일을 보았다. 5시에 주인아저씨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도시락까지 챙긴 다음 5시 45분쯤 출발하였다.
어제 저녁과 역순으로 아저씨는 우리들을 중고개재 근처에 되돌려 놓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우리 옆방에서 유숙한 젊은 친구 둘이 합류했다는 점이다. 어두운 밤길을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랜턴을 이마에 비끄러매고 스틱도 대충 펴서 조정을 하였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 차를 달리는 아저씨와 반대 쪽을 향하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제 내려온 길을 약 10여 분간 되짚어올라간 지점에서 중고개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젊은이는 출발지점에서 우리의 단체 사진을 한 장 찍어주고 먼저 떠나갔다. 우리는 여전히 넷이었다. 그들이 먼저 어둠을 가르고 앞서간 뒤 우리도 서서히 별빛을 온몸에 받으며 출발하였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산의 능선이 하늘과 땅을 나누고 하늘의 별빛과 민가의 불빛이 비대칭의 조화를 뿜어내고 있었다. 발아래로는 눈이 사각 사각 밟혀 온다. 어제도 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분적이었고 제한적이었던 반면 오늘은 질이나 양에 있어 모두 어제를 능가한다.
밤길은 낮 길에 비해 친구들 간의 간격이 대개는 훨씬 좁혀지게 된다. 랜턴은 한 줄로 이어지고 눈 속에서의 걸음은 앞 사람의 발자국을 확인하듯 찍고 가면 된다. 그래야 보다 안전하고 눈의 찬 기운도 덜 느끼게 된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날은 밝게 마련이라더니 이제 어느 정도 지나면서 성암이 불을 꺼도 된다고 한다. 아마 7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으리라. 이제 불이 불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아침노을이 오른 쪽 먼발치의 산등성이 위로 우리를 엿보고 있다. 머잖아 터질 동녘의 아침 향연의 준비가 거의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일 시 분명하다. 물체들이 불의 도움 없이 환히 동공을 파고듦과 동시에 하늘의 별빛도 민가의 불빛도 부끄러운 듯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동녘 하늘의 해도 소리 없이 나뭇가지 사이로 출렁이며 넘나든다. 계곡마다 마을이 옹기종기 서려 있고 엷은 연무가 산과 마을을 감싸고도는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신선이 노닌다는 동천(洞天)이 아마 저렇지 않을까 싶은 상념에 빠져본다.
그 이름도 순결한 백운산(해발 1,278.6m)이 안겨든다. 백운(白雲), 곧 흰 구름이란 이름자를 단 봉우리가 전국에 무려 30여 개나 된다고 하니 가히 그 유명세를 알 수 있다. 그 많은 백운 가운데서도 우리가 올라선 이곳 백운산이 가장 높은 데다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좋다고 한다. 나머지를 다 가보던 못하였으니 사실 여부야 확인할 길이 없지만 대략 그것이 빈말은 아니겠지 싶다. 하여간 정상에 눈과 구름이 많은 것이 특징이라 한다. 하기야 그래서 붙은 이름이 백운이겠지만 서도. 행정구역상으로 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이 공유하고 있고 그와 걸맞게 전라도와 경상도를 흐르는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이루는 곳이다.
잠시 서 있는 가운데도 찬바람은 여지없이 매몰차게 몰아쳤다. 하지만 두고 가기에는 아까운 경관을 조금이라도 더 눈과 마음에 담아두고 싶어 미련을 가져보다 떨어질세라 앞서 간 친구들의 뒤를 바짝 붙좇는다. 내리막길은 제법 미끄럽기도 하여 아이젠이라도 하고 가면 좋으련만 이 친구들은 겁도 없이 잘도 간다. 혼자서 아이젠을 한다는 것도 멋쩍어서 에라 모르겠다며 그대로 부지런히 따라가지만 발걸음은 여간 조심스럽게 내딛지 않을 수 없었다.
눈 속이라 그런가. 조릿대가 평소보다 더욱 푸르러 보인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송백(松柏)이 푸름을 알 수 있듯 대나무 또한 사군자의 한 자리를 차지한 까닭이나마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호랑이라도 웅크리고 있을 만한 대숲은 이제 대간꾼들의 살가운 벗이 되어주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가끔 올려다보고 먼발치로 지나온 곳, 또는 앞으로 가야 할 곳들을 바라보며 대충 어느 정도 왔나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바람이 대숲을 훑으며 사각사각 내는 소리는 분식된 속세의 소리와는 견줄 수 없는 또 다른 감동을 안겨 주곤 한다.
앞서가던 지산은 눈가를 훔치며 눈물이 나와 말라붙어 소금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어느새 찬바람 앞에 이제 눈물까지 나오는 나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벗들과 함께 백두대간의 장정을 하게 됨은 그나마 위안거리로 삼기에 족하지 않을 것인가?
8시 40분. 우리는 백운산과 영취산의 중간 지점(양쪽 모두 1.7km)에 이르렀다. 따로 봉우리 이름은 없었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갈 길이 멀어도 그러기에는 너무나 근사한 유혹이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 삼척에서 오셨다는 한 부부와 조우했는데 아주머니께서 ‘술 한 잔 줄까요’라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맹자는 이럴 때 쓰라고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말을 지어낸 모양이다. 우리가 감히 먼저 청할 수는 없었어도 마땅히 바라는 바가 아니었겠는가? 전혀 마다할 가능성은 1%도 존재하기 어려운 초절정의 제의요, 유혹이었다. 더구나 지산 앞에서 그런 제의라니.
술을 별로 마시지 않는 성암은 물론이고, 거의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곡마저 조금이나 맛볼 기회를 가졌다. 달착지근한 술의 이름은 ‘야관문(夜關門) 술’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듣도 보도 못했던 이름이라 그 연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차계섭이라는 분의 말씀인즉 이 술을 마시면 밤에 늦게 들어가도 부인이 빗장문을 열어준다는 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술이기에 앞서 또 다른 훌륭한 효능이 있음에 분명하다. 우리는 졸지에 귀한 약주를 그 대단한 가치도 알아보기 전에 냉큼 받아 마신 것이다. 하여간 우리는 그 분들 덕분에 산중에서 예기치 않은 귀한 술을 맛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산기(山氣)는 적당한 주기(酒氣)마저 더해 산행 길을 더욱 기름지게 하였다.
9시 50분경에 우리는 영취산(靈鷲山 : 1,075.6m)에 발을 내려놓았다. 석가모니가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설법했다는 인도의 영취산에 따온 이름이라 한다. 전국 곳곳의 산과 봉우리 이름에 유독 불교식 이름이 많은 것은 불교가 삼국에 전래된 이래 우리 땅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음을 보여주는 증좌고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취산은 호남과 충남의 산줄기를 이어주는 금남호남정맥의 출발점이라는 데서 그 나름 중요성을 띠고 있는 곳이다. 지나온 백운산이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었다면 이곳에서는 거기에 금강을 하나 더 보탠다. 행정구역은 여전히 경남 함양과 전북 장수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침 우리나라 산줄기에 대한 얼개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어 잠시 들여다보았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것을 백두대간이라 하는 바 이는 무려 총연장 1,400km가 된다. 그 중 남북으로 허리가 잘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향로봉까지로 684km라고 한다. 그 중 우리는 매 달 1차례씩 조금씩이나마 그 간격을 좁혀가고 있는 것이다.
영취산을 내려서서 1.4km 구간 되는 곳에 이르니 논개생가를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다. 4.6km가 떨어져 있으니 10리가 좀 넘는 길이다. 여유가 있으면 한번 들러보아도 좋으련만 갈 길이 머니 마음뿐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 땅은 왜군들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전쟁 후 파악되는 전지가 1/3정도 밖에 되지 않았고, 왜군과 명군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처참한 변을 당하였다.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었다는 ‘인상식(人相食)’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비참한 국제 전쟁이 바로 당시 임란이 아니었던가.
건국 이후 200여 년간 일부 국지전을 제외하면 조선시대는 그야말로 승평세월이었다. 그러다보니 방군수포(放軍收布) 하에 군대는 형식만 남았을 뿐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왜군에게 일패도지하였고, 그나마 의병의 활동과 명군(明軍)의 참전으로 꺼져가는 국운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 중에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과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이 그나마 조선군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 두 대첩과 함께 3대첩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게 바로 진주대첩이다.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왜군을 맞아 대승함으로써 호남의 곡창지대로 진출하려는 왜적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던 것이다. 진주대첩은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함께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투로서 손색이 없는 임진왜란의 승전사를 장식하였다.
그러나 후일 그에 대한 왜적의 대규모 공격이 분풀이로 행해져 악전고투 끝에 진주성은 비운의 함락을 맞게 된다. 그 중 순절한 세 장수 가운데 한 명이 최경회 장군이었고, 그 분이 바로 논개의 부군이었다.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하여 남강 촉석루에서 열리는 적들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고 기회를 틈타 적장을 끌어안은 채 푸른 남강 물로 뛰어들어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어찌 보면 우리와 일본 간에 놓여있는 간극은 바로 임진왜란이나 경술국치 등과 같은 뼈아픈 적대적 추억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된 지 꼭 100년 째 되는 해이다. 그러한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양국 간에 불편한 관계가 영속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동북아의 발전적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 잘못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화해 및 협조가 절실한 형편이다.
머잖은 곳에서 덕운봉(983m)이 자리하고 있었다. 흰 구름은 어느 사이 덕이 있는 구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갈 덕유 능선이 손에 잡힐 듯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지산은 가다가 곧잘 멈춰서 부스럭부스럭 카메라를 꺼내 이내 산의 경관들을 사진으로 담아내곤 한다. 그러다 보면 성암과 거곡은 저만치 앞서가기 일쑤이다.
11시 10분 우리는 이제 맞춤한 자리를 하나 골라잡고 앉았다. 아침이 일렀던 만큼 점심도 앞으로 당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라도 되는 듯 우리들은 적당히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자리가 비좁아 앉는 둥 마는 둥 빙 둘러 선채 식사를 하였다. 지나는 사람들은 아랫길도 있건만 구태여 우리가 있는 길로 지나기도 한다. 한편 우리가 길을 막고 있는 듯하여 미안한 감이 없지도 않지만 한편 얄궂기도 하다. 1시간 정도의 시간은 점심과 함께 쉽게 소진되었다.
식곤증을 즐길 새도 없이 출발한 지 약 1시간 정도 거리에서(1시 17분) 북바위(977m)를 만났다. 이곳 또한 전라도와 경상도를 경계 짓는 곳으로 신라와 백제의 영토분쟁 지역 중 하나라고 한다. 승리하면 이곳에 올라와 북을 쳐서 북바위라는 명칭이 생겼다는 큼직한 설명서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사실 여부야 알 수 없지만 원래 옛날 전쟁에서는 북을 치면 전진을 하고 징을 치면 후퇴를 하게끔 되어 있다. 통신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소리 신호를 통해 통제하는 그 나름대로의 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남을 독려하는 것을 고무(鼓舞)한다고 하는데 북이란 그렇듯 힘찬 동력의 힘을 안고 있다.
얼마 전부터 성암이 앞서가기 시작하였는데 북바위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그만큼 거리가 더 멀어졌다. 거곡과 지산에게 뒤를 맡기고 부지런히 성암의 뒤를 쫓아가보니 저만치 앞에서 다른 일행과 가고 있다. 이미 확인이 된지라 구태여 계속 따라가지를 않고 민령을 지나 구시봉(2시 15분, 1014.8m)에 이르러 뒤에 오는 친구들을 기다렸다. 원래는 삼국시대에 군사들이 기(旗)를 꽃아 깃대봉이라 하던 것을 최근(2006년)에 어떤 풍수가에 의해 구시형이라 하여 구시봉으로 이름을 바뀌었다고 하는 데 역시 한자 표기가 되어 있지 않으니 그 뜻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구시봉의 동쪽은 물이 추상천을 통해 낙동강으로 흐르고, 서쪽은 장계천을 통해 금강으로 흐른다고 한다. 이제 섬진강은 저만치 뒤안길로 사라졌다. 뒤미처 온 두 친구를 맞이하며 보니 지산이 스틱 하나에 의지하고 있다. 잠깐 실수하여 살짝 넘어지면서 스틱이 부러졌다고 한다. 그나마 다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얼마간 내려오니 샘이 하나 나타난다. 비록 배낭에 물이 있다하나 어찌 산중의 물맛을 마다할까. 한 바가지 물을 시원하게 들이키는데 앞 표지판에 재미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시는 길손이시여!
사랑 하나 풀어 던진 약수 물에는 바람으로 일렁이는
그대 넋두리가 한 가닥 그리움으로 솟아나고......
우리는 한 모금의 약수 물에서 구원함이 산임을 인식합시다.
우리는 한 모금의 약수 물에서 여유로운 벗이 산임을 인식합시다.
깃대봉 약수터를 사랑하는 사람들”
다시 거곡과 지산을 등진 채 성암을 찾아 부지런히 앞장서 나갔다. 그러나 얼마나 떨어졌기에 꼬리가 잡히지 앉는다. 그러다 갈림길에 들어섰다. 육십령휴게소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 위에 누가 매직 같은 것으로 ‘대간길↑’이라고 친절하게 써놓은 것이 아닌가. 순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삼각지 로터리에서 결국 대간 길을 잡아내려서는 데 전화벨이 울려왔다. 성암이다. 휴게소 쪽으로 내려오란다. 이미 지나친 길을 찾아 다시금 올라 이번에는 휴게소 쪽으로 내려갔다. 성암이 반갑게 맞았고, 민박집 아저씨도 이미 오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이어 지산과 거곡이 내려섰다. 3시 15분쯤 우리는 이틀간의 긴 산행을 마치고 또 하나의 소성을 이룬 것이다.
민박집 아저씨의 차를 타고 민박집까지 가는 데는 40분 정도가 걸렸다. 우리는 이내 거곡의 차로 갈아타고 서울을 향하였다. 서울에서는 오후 들어 눈이 오기 시작하여 교통이 마비된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마침내 우리도 고속도로선상에서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차량의 속도는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성암이 춘천으로 가지 않고 의정부 처가로 간다고 하여 코스는 경부선을 잡았다. 길은 막히고 배꼽시계는 신호를 보내는 가운데 청원휴게소에 들러 가볍게 저녁을 해결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달마와의 조우가 이루어졌다. 생각지 못한 만남이었기에 왠지 모를 반가움이 더욱 배가되었다. 그가 대구에서 거행된 친척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마침 그가 가는 방향이 성암과 비슷해 성암은 그 차를 타고 가기로 하고 우리 셋은 다시 눈길의 느린 행렬에 합류하였다.
차는 주차장이 된 도로의 답보상태에 그대로 몸을 맡긴 채 천천히 흐름에 그저 밀려가는 듯 했다. 꿈틀거리던 차량의 속도가 그나마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 오산쯤이나 되어서였던 것 같다. 지산은 한남동에서 차를 내려 택시를 타고 귀가길에 오르고, 남산으로 통하는 후암동 길이 막히는 바람에 나는 거곡의 배려로 후암 종점까지 편히 갈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거의 자정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가 가야 할 백두대간의 길이는 점점 짧아져 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과 반비례하며 같이 산행하는 친구들과의 우정은 그만큼 이상의 무게로 도타워져 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같이 산행을 하는 친구들은 물론 주위에서 격려해주는 친구들에게 늘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만 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