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헌도 혀를 내두른 열녀
〇 최충헌도 혀를 내두른 열녀
《고려사》 열전(列傳) 가운데 반역전이 있다. 반역한 사람들의 행적을 모아 기록한 것이 곧 반역전이다. 무신 정권을 공고히 한 최충헌(崔忠獻) 역시 반역전에서 취급되고 있다.
처음에 나라를 세우거나 전란 시기에는 무신들이 각광을 받게 되지만 일단 평화시기로 접어들면 무신보다는 문신이 대우를 받게 되어 있다. 고려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신란이 발발하기 직전의 고려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문신의 위세가 극을 달릴 정도로 기세등등하였던 데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신이 무신의 뺨을 때리기도 하고 수염을 태우는 등 모욕적인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무신란이 발생하였다. 문신의 관을 쓴 사람은 거의 다 죽인다고 할 정도로 거센 피바람이 고려 조정을 뒤흔들었다. 처음에 정중부가 무신란의 중심에 섰지만 몇 차례의 권력자가 교체 되는 가운데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무신정권의 기틀을 공고히 한 인물이 바로 최충헌이었다. 최충헌 이후 몇 대를 내려가며 소위 최씨 무신정권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최충헌의 집권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숙청당하였는데 그 와중에 좌승선 문적(文迪) 또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 당시 문적의 처 최씨는 송장이 즐비하게 쌓인 가운데에서 남편의 시신을 찾아내어 머리에 이고 갔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음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다. 최충헌 역시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열녀’라고 차탄해마지 않으며 장례를 치러 주게 하였다고 한다. 최충헌이 비록 많은 사람을 살상하며 집권하였지만 그 역시 최씨의 장한 행동에는 나름대로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IMF위기 때 경제적 이유로 인한 이혼 사례가 급증하였다는 우울한 소식을 들은 일이 있다. 지금은 IMF 위기 때보다도 더 어렵다는 말들이 심심찮게 거론되는 것을 보면 그런 불행한 일들이 재연될 가능성 또한 매우 높아 보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나름대로 사정이야 있겠지만 어려울수록 오히려 서로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 나가도 부족할 판에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이별을 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든 불행한 일임에 틀림없다.
서로 다른 배경과 환경 속에서 자라 맺어진 부부는 이미 결혼을 하는 순간 죽어 한 구덩이에 들어갈 지고지순한 약속을 한 셈이다.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극한 상황이 아닌 이상 신성한 약속은 끝까지 이행되도록 서로 최선을 다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극단의 상황 하에서도 두려움을 극복하며 남편을 찾아 안식처를 마련하려는 최씨의 행위는 천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게 여겨지는 까닭일 것이다.
(* 2009년 2월 2일 용두팔 게시판에 올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