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인사
○ 공정한 인사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입을 여러 차례 받은 뒤 원종(元宗) 때 결국 원(元) 세조(世祖)에게 굴복하고 출륙환도(出陸還都 : 섬인 강화도를 떠나 개성으로 돌아간 일)하게 된다. 이때부터 역사에서는 공민왕이 반원친명정책을 쓸 때까지 원간섭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고려의 왕은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어 부마국으로 전락하여 왕의 명칭에도 모두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충(忠)자를 붙이게 되었다. 그나마 몽고군에게 강렬하게 저항했기에 불완전하나마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충자를 붙인 왕 중의 첫 번째 왕이 바로 충렬왕(忠烈王)이다.
어느 때인가 충렬왕이 좌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전에 이혼(李混) ․ 윤보(尹珤)가 전선(銓選 : 인사)을 담당하였을 때 과인(寡人)이 혼(混)의 제자 화(和)를 행수(行首 : 우두머리)로 삼고자 하니 혼은 사양하면서 하는 말이 ‘신이 전조(銓曹)에 대죄(待罪)하고 있는데 신의 제자가 행수로 된다면 남들이 신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하였고, 또 보(珤)의 아들 안비(安庇)로 권무(權務)를 삼았더니 보도 또한, ‘신의 자식이 나이도 젊으려니와 신이 또 전선을 맡고 있으니 감히 명(命)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하였으니, 지금에 전선을 맡은 자는 좋은 관직을 제 친척에게 주면서도 과인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는 데 하물며 감히 사양을 한다는 말이냐? 이 때문에 염치가 날로 없어지고 세도(世道)도 날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혼과 윤보와 같은 사람은 가히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충렬왕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그의 말년에 염치를 잃는 행위가 만연되기에 이르렀으니 결국은 그것이 고려가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요즈음 곳곳에서 부정과 부패, 비리가 하루가 멀다않고 터져 나온다. 심지어 교육계마저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음을 바라보면서 과연 이 사회의 염치는 어디에 맡겨 둔 것인지 한심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교장이 되어 누구를 가르치려고 들기 전에 스스로 제대로 공부해야 마땅하거늘 뇌물 행위 등을 비롯한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며 자리를 차고 앉아 어찌 바른 교육을 논할 수 있겠는가?
(* 2010년 3월 3일 용두팔 게시팔에 올린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