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지방자치시대라고 한다. 지방자치시대는 지역주민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지역발전을 이루어내는 것이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본지는 안성의 각 마을과 주민들의 바람을 정확히 알고,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마을의 올바른 발전방향을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안성의 마을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을 탐방을 연재한다. 이번호에는 고삼면 신창리를 2회로 나누어 두 번째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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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실마을의 느티나무, 옛날에 이곳에서 창실, 천실, 창말 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를 했었고, 노제를 지내던 창실마을의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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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말입구에 있는 느티나무, 이곳에서 옛날에 창말 사람들이 고사를 지냈었고, 장승이 서 있던 곳이다. |
일제, 장수가 태어나지 못하게 지맥을 끊고
이름 있는 산과 유서 깊은 사찰이 있었던 신창리이니만큼 다양한 지명과 전설을 들을 수 있었다.
호동마을에서 들을 수 있었던 지명은 앞에서 이야기한 탑골이외에도 범티, 파계골, 지골, 독고개, 가마골, 사비골, 품도골, 제비골, 지청골, 앉은뱅골 같은 골짜기 이름과 개사니, 고래, 아지랑들, 서당배미 같은 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또 샘실과 창말에서는 큰골, 작은골, 미친개울, 까치골, 서낭댕이, 돌산거리, 향림보, 구배미보, 창말고개, 소가래, 밭가래, 구레, 고개지, 새보안, 두깽골, 개랭이, 장터, 장터고개 같은 다양한 지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지명에 얽힌 유래를 다 들을 수 없었지만, ‘지골’은 1,000명이 피난할 수 있는 피난고지 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미친개울은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미친듯이 불어나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당배미는 서당에 글세로 논을 경작하게 한 논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파계골이나 품도골 같은 지명은 이곳에 있던 사찰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장터’와 ‘장터고개’ 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전설을 들을 수 있었다.
장터고개는 원래는 하나였는데 일제시대에 길을 하나 더 내서 아래고개가 새로 생겼는데, 이것이 일제가 의도적으로 지맥을 끊기 위해 낸 길이라고 한다.
즉 ‘장터’는 ‘장수가 태어날 터’라서 지맥을 끊은 것이며, 길을 낼 때 피가 흘렀다는 전설이다.
또 장터에 섰던 시장은 도둑이 많아 없어졌다고 하고, 이곳에 있던 우물은 물이 좋아 이름난 소화 14년(1939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인근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한다.
가물면 흙을 덮던 돌
또 호랑이가 많이 나왔다는 범골에서는 시퍼런 호랑이 불을 봤다는 안응섭(87세)씨의 증언도 들을 수 있었고, 도깨비 불이 왔다갔다 하고, 도깨비가 나왔다는 ‘도깨비 샘’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전설은 ‘돌산거리’ 혹은 ‘돌선거리’와 관련된 전설이다.
‘돌산거리’는 창실 마을 입구에 있는 지명인데 이곳에는 1m가 조금 넘는 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유래가 재미있다.
인근마을 사람들이 멀리 쌍령산까지 가서 갈퀴로 땔감을 긁어오는 ‘갈퀴나무’를 해 오다 돌산거리에서 쉬게 되었는데, 그 나무에 섞여 있던 작은 돌 하나가 이곳에 떨어져 자라서 생긴 돌이라는 것이다.
비가 안와 가물면 이 돌에 흙을 덮었다고 한다.
이 돌과 관련해서 조선지지자료에 ‘돌션거리(石立坪)’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또 창말은 그 마을 모양이 배의 모양이라 가장자리에 집이 들어섰는데 그 이름을 ‘턱미잔등’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큰샘실, 작은샘실, 창말이 함께 한 줄다리기
신창리는 다른 어느 마을 못지않은 풍부한 민속이 남아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우물제사와 산제사, 노제, 장승제 등 다양한 민속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먼저 두레와 줄다리기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을 안성 남사당 보존회원이며 마을 최고령자인 정진태(88세)옹과, 최순칠(73세)씨 등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두레놀이는 특히 줄다리기 할 때 많이 했는데 신창리의 줄다리기는 인근 양성면의 방축리와 대갈리 사람들이 함께 했다고 한다.
즉 매년 각 마을에서 돌아가면서 줄다리기를 했다는 것이다. 신창리의 줄다리기는 큰샘실 마을에서 수놈 줄을 만들고, 작은 샘실에서 암놈 줄을 만들어 줄을 메고 큰샘실, 작은샘실, 창말 3동네를 다 다녔다고 한다.
이 때 두레패도 두패로 나뉘어 흥겹게 놀았다고 하는데, 큰 샘실 큰 느티나무 앞에서 줄을 다렸다. 신창리 역시 양성면 명목리와 같이 살림을 맡아 하는 여자가 이겨야 풍년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정진태 옹에 의하면 신창리의 두레가 유명해진 것은 동네에 쇠치는 공하열이라는 사람이 들어와 가락을 전수하면서라고 하는데, 고삼면에서 가장 잘 노는 동네 중 하나로 소문이 났고, 1989년 안성 남사당 보존회가 처음 결성될 때 이 곳 신창리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고 한다.
창말의 산제사와 창실의 노제
우물제사는 호동마을에서 지냈는데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약 80여년 전부터 지내기 시작했고, 예전에는 정월 초사흗날 지냈지만 최근 들어서는 10월 초 하룻날로 옮겨서 지낸다고 했다.
창말에서는 예로부터 봉림산에서 산제사를 지냈으나 최근에는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창말은 음력 10월 초하룻날 지냈는데 짚으로 이엉을 엮어 마을 사람들이 지고 올라가 산제당을 새로 보수하고 밤 11시쯤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렇게 산제사를 지내고 횃불을 흔들어 창실마을로 신호를 보내면 창실마을에서 노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산제사를 지내고 내려온 창촌 사람들은 마을로 내려와 큰 아카시아 나무 있던 돌산거리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팽나무 있는 곳과 창촌마을 느티나무 있는 곳에서 차례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특히 팽나무 있었던 곳과 느티나무 있는 곳에는 장승이 있어서 제사를 지내고 내려온 후에는 장승을 새로 해 세웠었다고 한다.
그런데 창말에서 지내던 산제사는 이어지지 않고 있으나 창실에서 지내는 노제는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즉 창촌사람들이 횃불로 신호를 보내면 창실사람들은 마을 느티나무 앞에서 노제를 지냈는데, 이 노제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마을 사람들은 옛날에 창말 사람들이 창실 사람들로부터 어른 대접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일제에 맞서 싸웠던 최은석 고서면장
신창리는 옛 양지현의 관아가 있던 마을일뿐만 아니라 1914년 이전까지는 옛 고서면(古西面)의 면사무소가 있던 마을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고서면의 면장이었던 ‘최면장’을 기억하고 있었고, 창실 마을 가장 안쪽에 ‘최면장 집’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최면장의 증손자인 최황섭 안성시의회사무과장과 최황섭 과장의 형님인 최봉섭씨(74세)를 만나 최면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최면장은 최은석(崔殷錫, 1854년-1929년)면장인데 12살 때 조실부모하고 어렵게 성장했으나 한학에 열심이었고 책임감이 투철한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국권을 침탈당하던 1910년을 전후해 약 5년간 고서면장을 지냈다고 하는데, 지방관리로 일제의 정책에 맞서 싸웠고, 그로 인해 주민들의 신망을 받았다고 한다.
해주 최씨의 5대 종손이기도 한 최봉섭씨는 “증조부께서 일제에 맞서 싸워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으나, 일제의 감시 감독을 받아 운명하실 때는 식량이 없어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고 들었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신창리 제일부자 오참봉
신창리에서 마을 사람들이 최고 부자로 기억하는 사람은 오참봉이었다.
해주 오씨의 후손인 오참봉은 마을 뿐만 아니라 강원도 철원에도 땅이 많아 집은 초가이지만 30-40칸 규모였다고 한다. 그 아들이 고삼면장을 지냈고, 고삼저수지의 위치를 현재의 위치로 하는데 공이 컸던 오경환 면장이다.
이 오경환 면장의 큰 아들은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현대그룹의 계열사를 운영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오참봉의 집에 옛날 책이 많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부자였다는 근거가 될 것을 두려워 해 모두 불태웠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편 고삼면 전체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지주로 소문난 사람이 용인 노루실의 이평화인데 신창리에도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인근에서 유명했던 글방 선생으로 이형노 선생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살았으면 140세쯤 되었을 것이고 일본말도 잘 했다고 하는데, 오석필 고삼면 노인회장도 이형노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창리에는 ‘승냥간’이라고 하는 소의 편자를 만들어 신겨주는 시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면의원을 지낸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가마니 만들어서 부자된 동네
호동마을에서는 황규흥, 황희성, 정길봉, 최재덕 겉은 사람들이 40마지기농사(1마지기 150평)를 지어 부자소리를 들었는데, 특히 호동마을 전체가 근면하고 성실해서 부촌소리 듣던 동네라고 이야기했다.
호동마을에 속한 농지는 많지 않았지만 ‘해방후 가마니를 만들어서 부자 된 동네’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근면 성실하게 노력해서 해방후에는 고삼면에서도 호당 경지면적이 가장 많았던 동네로 소문났다고 한다.
갈미뜰의 논과 밭도 호동사람들이 많이 지었는데, 마을에서 만난 황규필(82세)씨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호동마을의 경우 가마니뿐만 아니라 퇴비실적도 좋아서 김계원 군수시절 한내다리도 놓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즉 서상린 의원이 애를 써서 한내다리를 놓은 것이 아니라 호동마을 사람들 덕에 한내다리가 놓이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또 새마을 운동하던 시절 퇴비증산과 관련해 경기도지사가 주는 장려상을 받았고, 당시 경기도지사가 방문해 마을 숙원사업 해결차원에서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이야기는 창실 마을에서도 들을 수 있었는데 당시 새마을 지도자였던 이인상씨는 새마을 우수마을로 당시 돈 100만원을 하사받았고, 박대통령 특별지시로 도지사도 새마을 지도자가 면담을 요청하면 10분내에 면담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며, 새마을 지도자 신분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다.
국내 최대규모라던 양돈단지에 대한 기억
고삼저수지가 생기기 전 봇물을 대기 위해 보름간을 논 근처 야외에서 이불을 덮고 잤다는 고단했던 옛시절의 삶과 관련해 이야기와 땅이 떨어져 나무가 서 있는 채로 떠 내려오던 1991년의 장마에 대한 기억도 들을 수 있었다.
또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양돈단지가 20여년전 최초로 마을에 들어설 당시의 옛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전국 최대 규모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국회의원들도 견학을 했다는 이 양돈단지가 처음 들어설 때 동네가 부자되는 줄 알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당시 국회의원이 선거운동 도와 준 사람을 ‘끌지도 못하는데 되게 밀어서’ 시작된 이 양돈단지 사업은 결국 ‘치어서 망하게’되고 이로 인해 보증 선 사람 등 동네사람 15명 정도가 피해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양돈단지는 지난 겨울을 휩쓴 구제역 대재앙으로 인해 1만3,000마리가 넘는 돼지를 살처분해서 묻었고, 그 매몰지는 신창리 3층 석탑 인근에 있었다.
다행히 고삼면에서는 구제역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신창리 사람들, 특히 호동마을 사람들은 버스가 다니지 않아 2km가 넘는 길을 걸어 나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마을 길 2차선으로 확장되었으면
신창리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숙원사업은 가유리에서 신창리를 통해 대갈리고 가는 길이 2차선으로 확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호동사람들도 마을로 통하는 마을 안길이 최소한 차량이 교차해서 지나갈 수 있는 넓이로 확장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또 농업용수확보를 위한 양수장이 하나 더 있었으면 하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마을의 자랑이고 고삼면의 자랑인 삼층석탑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옛날에 신창리에는 ‘댓마루정’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즉 마을에 들어와 1년이상 살면 떡을 하고 술을 빚어 마을 사람들에게 돌리며 더불어 살아가는 도리를 베풀던 풍습이다.
그러한 옛 풍습을 떠올리며, 각박해진 요즘 세태에 대해 안타까워 하면서도,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마을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신창리 사람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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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준 김경수 창실 노인회장(7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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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공수훈자이면서 새마을 지도자를 역임한 이인상씨(8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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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창리 최고령자이면서, 남사당 보존회원이기도 한 정진태옹(8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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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친이 호동 ‘안말’에 최초로 정착했고, 호동마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준 황규필(8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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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석 고서면장의 증손자인 최황섭 안성시 의회 사무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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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림산이라는 지명과 고창이라는 명칭이 보이는 광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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