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심(詩心)/한국의 시 170

어머니

- 김사랑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의 파도같은 주름살을 차마 볼 수 없어 가슴에 말라붙은 젖을 볼 수 없어 모른체 살아 왔지만 사랑의 굴레같은 길에 와서야 당신이 얼마나 저를 사랑 하셨는지 이제야 조금 느꼈을 뿐인데 어머니, 당신을 사랑은 끝이 없네요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 절 낳으시고 길러 주셨는데 모른체 살아온 반 평생 늘 한쪽 가슴이 시리면서도 툭하면 잊고 사는 날 뿐이지요 당신이 제게 주셨던 마음 티끌만큼도 값지 못한채 아래로만 흐르는 내리 사랑을 어찌 할까요 어머니, 어머니, 당신의 사랑은 저의 하늘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저의 바다입니다

오월에

- 나태주 1. 찰랑찰랑 애기 손바닥을 흔드는 미루나무 속잎 속에 초집 한 채가 갇혔다. 하이얀 탱자꽃 내음에 초집 한 채가 또 갇혔다. 들머리밭엔 노오란 배추꽃 바람. 햇살남매 모여 노는 초지붕 그 아랜 작은 나의 방. 2. 치렁치렁 보릿고랑에 바람 흘러간다. 내 작은 마음 흘러간다. 길슴한 보리모개 사이로 보얗게 목이 팬 그리움. 부질없이 화사한 고전의 의상. 웃으며 네가 웃으며 나래 저어 올 것만 같은 날에. 머리칼이라도 조금 날릴 것 같은 날에. 3. 푸른 언덕이 뱉아놓은 흰구름덩이. 흰구름덩이 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가는 새끼제비의 비행연습. 네 생각하다 잠들었다, 오후. 문득 시게풀꽃 내음에 흩어지는 나의 꿈. 4. 누군지 모를 이 기다리고 있을까 싶어 언덕에 나와 휘파람 불면 눈썹..

5월이 오면

- 황금찬 언제부터 창 앞에 새가 와서 노래하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심산 숲내를 풍기며 5월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저 산의 꽃이 바람에 지고 있는 것을 나는 모르고 꽃잎 진 빈 가지에 사랑이 지는 것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오늘 날고 있는 제비가 작년의 그놈일까? 저 언덕에 작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일까? 5월은 4월보다 정다운 달 병풍에 그려 있던 난초가 꽃피는 달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달 5월이다.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來日)은 이길 것이다

- 신동엽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억(億)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생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 어리석은 자 떼 아직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포도 위 묘향산 기슭에도 속리산 동학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 묵묵히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고을마다 사랑방 찌갯그릇 앞 우리들 두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벚꽃

- 안재동 천지(天地)에 저뿐인 양 옷고름 마구 풀어헤친다 수줍음일랑 죄다 땅 밑으로 숨기고 백옥같이 흰 살결 드러내 하늘에 얼싸 안긴다 보고 또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 자태 찬란도 단아도 이르기 부족한 말 수십 여일 짧은 생 마른 장작 타듯 일순 화르르 온몸을 아낌없이 태우며 세상천지를 밝히는 뜨거운 사랑의 불꽃 아무리 아름다워도 찰나에 시들 운명, 순응이나 하듯 봄비와 산들바람을 벗삼아 홀연히 떠나버린 자리에 오버랩되는 고즈넉한 그리움

매화꽃이 필 때면

- 박노해 청매화가 필 때면 마음이 설레어서 아침 길에도 가보고 귀갓길에도 가보고 달빛에도 홀로 가 서성입니다 청매화 핀 야산 언덕에 홀로 앉아 술잔을 들고 멀리 밤 기차가 지나가는 걸 바라보면 아, 그리운 사람들은 왜 멀리 있는지 꽃이 필 때면 왜 더 멀리 멀리 있는지 꽃샘바람에 청매화 향기는 나를 못살게 못살게 흔들고 그대가 그리워서 얼굴을 묻고 하르르 떨어지는 꽃잎처럼 그냥 이대로 죽고만 싶습니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그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

​ - 이채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내가 잡초 되기 싫으니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 털려고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고 들면 못 덮을 허물없으되 누구의 눈에 들기는 힘들어도 그 눈 밖에 나기는 한순간이더라 귀가 얇은 자는 그 입 또한 가랑잎처럼 가볍고 귀가 두꺼운 자는 그 입 또한 바위처럼 무거운 법 생각이 깊은 자여! 그대는 남의 말을 내 말처럼 하리라 겸손은 사람을 머물게 하고 칭찬은 사람을 가깝게 하고 넓음은 사람을 따르게 하고 깊음은 사람을 감동케 하니 마음이 아름다운 자여! 그대 그 향기에 세상이 아름다워라

하다못해 죽어 달려가 올라

- 김소월 아주 나는 바랄 것 더 없노라 빛이랴 허공이랴, 소리만 남은 내 노래를 바람에나 띄워서 보낼 밖에. 하다못해 죽어 달겨가 올라 좀 더 높은 데서나 보았으면! 한세상 다 살아도 살은 뒤 없을 것을, 내가 다 아노라 지금까지 살아서 이만큼 자랐으니 예전에 지내 본 모든 일을 살았다고 이를 수 있을진댄! 물가의 닳아져 널린 굴꺼풀에 붉은 가시덤불 뻗어 늙고 어둑어둑 저문 날을 비바람에 울지는 돌무더기 하다못해 죽어 달려가 올라 밤의 고요한 때라도 지켰으면!

아침의 기도

-용혜원 이 아침에 찬란히 떠오르는 빛은 이 땅 어느 곳에나 비추이게 하소서 손등에 햇살을 받으며 봄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병상의 아픔에도 젋은 이들의 터질 듯한 벅찬 가슴과 외로운 노인의 얼굴에도 희망과 꿈이 되게 하소서 또다시 우리에게 허락되는 365일 삶의 주머니 속에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의 결실로 가득 채워 한 해를 다시 보내는 날은 기쁨과 감사를 드리게 하소서 이 해는 행복한 사람들은 불행한 이들을 건강한 사람들은 아픔의 사람들을 평안한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손길이 되게 하소서 이 새로운 아침에 찬란히 떠오르는 빛으로 이 땅의 사람들의 영원 향한 소망을 이루게 하시고 이 아침의 기도가 이 땅 사람들이 오쳔년을 가꾸어온 사랑과 평화로 함께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