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孟子)는 전국시대인 B.C. 371년 경에 추(鄒)나라에서 태어나서 B.C. 289년 경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본명은 가(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이다. 그는 공자의 삶을 모델로 하여 민생을 위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부국강병에 주력했던 당시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실 정치의 벽에 부딪친 맹자는 일선에서 물러나 제자들과 시서(詩書)를 논 하고 공자의 뜻을 계술하여『맹자』7편을 지었다. 『맹자』는『대학』•『논어』•『중용』과 함께 사서(四書)의 하나로 유학사상의 중심을 이루며 오늘날까지 그 나름대 로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고에서는『맹자』를 통해서 나타난 맹자의 사상을 단편이나마 살펴보고자 하였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다
맹자가 학자로 대성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은 그의 어머니 장(仉)씨였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는‘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지금까지 자식 교육에 대한 전범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맹모는 아들이 이웃에서 돼지를 잡는 이유를 물었을 때 무심코 그를 주기 위해 잡는다고 답했다가 그 답이 거짓이 되지 않기 위해 돼지고기를 살 정도로 몸소 실천적 모습을 보였다. 공부를 하다 중도에 돌아온 맹자 앞에서 짜던 베를 끊어 중단 없는 공부를 요구했던 것도 그녀였다. 맹자란 인물이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맹자는 말할 적마다 요순을 일컬었지만 정작 그가 가장 닮고자 했던 인물은 공자였다. 그는 공자를 배우고 싶다[學孔子]거나, 공자를 사숙했음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그의 제후들에 대한 유세 또한 공자가 주유천하했던 모습을 빼닮았다. 그는 자신이 공자의 계승자임을 자임하며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늘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주야로 끊임없이 흐르는 물처럼 학문에 정진할 것을 요구하였다. 우물을 거의 다 팠더 라도 물을 얻지 못하면 파지 않은 것과 같게 여겼고, 아무리 좋은 곡식이라도 익지 않으면 익은 피만도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매사에 무리하게 억지로 조장(助長)하는 것 또한 달가워하지 않았다.
인의(仁義) 사상의 수호자를 자처하다
공자가‘인(仁)’을 강조한 위에 맹자는‘의(義)’를 보태 공자의 사상을 보다 심화시켰다. 맹자의 인의에 대한 집념은『맹자』7편을 통관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호연지기론(浩然之氣걩)도 정의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정의란 목숨 이상의 것이었다. 그의 정의는 민생에 바탕을 두었기에 백성은 왕보다 늘 무거운 존재였다. 왕은 민생을 위한 존재로 민생에 위해가 될 때 바꾸어야 할 대상이었다. 그가 강조하는‘인의’의 대척점에‘이(利)’가 있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을 때 왕이“어떻게 하면 나라에 이익이 될 것인가”를 묻자, 그는“어찌 반드시 이를 말하느냐?[何必曰利]”고 되받아치며‘인의’를 말할 것을 주장하였다. 사람들의 끊임없는 이익 추구는 하극상의 온상이자 전쟁의 주요인이었다. 끝없는 탐욕은 대기업에서 순대나 빵까지 팔면서 서민들의 골목 상권마저 노리게 됨을 그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사마천(司馬遷)이 양혜왕이 묻는 장면에서 책을 덮고 탄식한 것도 맹자의 말에 공감한 때문 이었다. 맹자가 이익 추구의 잘못된 관행을 대치할 수 있는 카드로 제시한 것이 바로‘인의’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하여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악행은 욕심 때문에 생긴다 하여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선설의 타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가 인간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우물에 빠지려는 어린애를 보면 누구나 모두 달려가서 구하기 마련이라 하였다. 이는 그의 부모와 교제를 맺기 위해서나 친구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가 아니며, 그 애를 구하지 않았을 때의 비난이 두려워서가 아닌,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성선설은 곧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인간성 회복에 대한 희망이었다. 따라서 그는 잃어버린 양심을 찾기를 강조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가축을 찾으면서 잃어버린 마음을 구하지 않거나 좋은 나무를 기를 줄 알면서 마음을 기를 줄 모르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는 또한 누구나 요순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요순의 옷을 입고 요순의 언행을 하면 그게 곧 요순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다 요순이 되지 못함은 자포자기 때문으로 보았다. 결국 사람은 착하게 태어나지만,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던 셈이다.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다
맹자는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을 견지하였다. 그는 스스로 몸을 굽혀 제후를 만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후에게 유세할 때도 좀처럼 주눅이 들지 않았다. 제후라야 작위가 높은 데 지나지 않고 나이로 보나 덕으로 보나 자신이 뒤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는 항상 할 말은 당당하게 하였고, 원치 않으면 노골적으로 기피하기도 하였다. 그는 스스로 말에 대해 잘 안다고 한 적이 있다. 말이란 마음에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장치이다. 그는 마땅히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는 것은 물론, 말해서는 안 될 때 말하는 것도 아첨으로 보았다. 양자 모두 뭔가 사적으로 바라는 게 있어 공익을 해치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그는 매사에 윗사람에게 지당하다고만 하면서 건의하나 제대로 하지 않거나 복지부동하면서 자리만 지키는 예스맨을 질타하였다. 반면에 윗사람은 아랫사람이 간하는 것을 잘 수용하기를 요구했다. 말은 곧 올바름의 소통 기구임을 인식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대동 사회를 꿈꾸다
맹자는 대동 사회를 꿈꾼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부모를 섬기는 것과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어른을 공경하고 남의 자식까지 사랑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혼자 즐기기보다 여민동락(與民同樂)을, 혈기의 용맹보다 폭군을 몰아내고 백성을 구제하는 탕왕과 무왕의 대용(大勇)을 요구하였고, 혼자 색(色)을 탐닉하지 말고 모든 남녀가 화목한 가정을 이루도록 해야 하며, 빈부가 양극화 되는 피자 판 키우기보다 분배 정의실현 차원에서 백성들에게 항산(恒産)의 제공을 권장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보고 듣는 것을 곧 하늘이 보고 듣는 것으로 여겨, 곧 천심인 민심을 어기면 천명을 옮기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고 왕도정치가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듯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른을 위해 간단한 심부름을 하듯 쉽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문제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행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었다. 그의 왕도정치 실현에 대한 해법은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로, 쉬운 것에서부터 어려운 것으로 차례로 발전하는 합리성을 전제로 하였다. 그는 당시 제후들의 행태를 연목구어(緣木求魚)로 보았고, 다른 제후에 비해 조금 나은 정치를 했다고 해도 오십보백보의 수준을 넘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한 잔의 물로 섶의 불을 끌 수 없고, 한술에 배부를 수 없듯 그들에게 지속적인 인의의 왕도정치를 주문했던 것이다.
우리시대,『 맹자』의 의미
결국『맹자』는 맹자가 겪고 배우며 토로한 자기 고백서나 다름없다. 거기에는 그의 인간 사랑이 짙게 배어 있으며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인생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맹자』는 단지 사회•정치•경제•문화•역사의 다방면에 걸친 내용을 담은 저작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수양서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를 정의라는 차원에서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샐던의『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그저 하나의 일화에 불과할 뿐이다. 삶을 영위하는 데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맹자』를 한 번쯤 접해 볼 필요가 있다. 『맹자』를 대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새로 뜨이게 될 것이다. 맹자가 자기 시대에 주어진 문제에 나름대로 고민하며 인간애를 추구한 사실은 우리가 현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충분한 길잡이가 되고도 남음이 있게 될 것이다.
김세봉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한한대사전편찬실 편찬원
* 그림 설명 및 출처
– 그림: 맹자(孟子,B.C. 371~289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