〇 팔마비(八馬碑)
고려 충렬왕 때 최석(崔碩)이 승평 부사(昇平府使)를 지내고 내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승평(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에서는 부사가 전임할 때 말 8필을 선물로 주는 관례가 있었는데 부사는 선물을 골라 가질 수 있었다.
최석이 전임하게 되자 고을 사람들이 말을 끌고 와 고르라 하자 ‘말은 서울(당시 개성)까지 갈 수 있으면 되었지 골라서 무엇 하겠느냐’며 사양하였다. 그리고 실제 자기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 말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고을 사람들이 관례임을 내세워 한사코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최석이
“내가 여러분들의 고을에서 부사를 지낼 때 말이 새끼를 낳았는데 그 망아지를 끌고 왔으니, 이것은 나의 탐욕이었소. 이제 여러분들이 말을 받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나의 탐욕을 알고 겉으로 사양하는 것이 아니겠소.”
라며 자신의 망아지까지 끼워서 돌려주었다. 이로부터 승평부에서는 전임자에게 선물로 말을 주던 폐단이 사라지게 되었다. 고을 백성들이 그 덕화에 감읍하여 그를 위해 송덕비를 세우고 이를 팔마비(八馬碑)라고 하였다고 한다.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
최석이 승평부 사람들이 주는 말을 그대로 받았다고 해서 뭐랄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의 관례였기 때문에 특히 비난받을 만한 일은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요즈음도 무엇이 문제될 때마다 상당 부분 관례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들도 대략 그러한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것이 관례라 하더라도 승평부 사람들에게는 큰 짐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가 아는 상식대로 법도를 지킨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승평부 사람들에게는 묵은 폐단을 제거한 쾌거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송덕비를 세웠다. 여덟 마리의 말과 관련되어 팔마비라고 명명된 이 비야 말로 억지 동원에 의해 세워지는 생사당이나 송덕비와는 그 유가 매우 다르다 할 것이다. 관례도 잘못 된 것이라면 과감히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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