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생각/정의(正義 )

피로를 한 방에 날려버린 아름다운 풍경

지평견문 2013. 6. 18. 05:26

              〇 피로를 한 방에 날려버린 아름다운 풍경

 

    방학이 아닌 한 수요일 밤은 유도회를 가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수요일이면 더욱 유난히 바쁜 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직장을 천안으로 옮기면서 아무래도 거리 뿐 아니라 시간상에도 이래저래 제약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어제는 바로 그 바쁜 수요일의 하루였다. 학교에서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천안역으로 이동하여 기차를 탔다. 다행히 동료 직원이 자가용으로 태워다 주어 무난하게 시간에 대갈 수 있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따로 없으니 대충 빵 따위로 적당히 배를 속여 두는 것이 그나마 길들여진 습관이다. 여수 발 용산 행 무궁화호가 천안을 출발하는 시간은 5시 38분, 출발 후 약 1시간 10분 후에 목적지에 다다랐다. 도착과 동시에 부리나케 플랫폼을 빠져나와 전철로 갈아타고, 종각역에서 내려 부지런히 걸으니 유도회까지는 10여 분 남짓 시간이 소요되었다. 다른 때 같으면 6시 반이면 시작할 수 있었던 수업을 천안으로 옮긴 뒤 다소 늦어져 7시 10분이 넘어서야 겨우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 수업을 마치는 시간도 9시에서 9시 반이나 거의 10시쯤 끝나게끔 되었다.

 

    귀가하기 위해서는 청계천을 지나 을지로까지 나가야 비로소 후암동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유도회를 출발하여 많은 인파와 부대끼며 밤거리를 약 15분가량을 거닐어야 하는 곳이다. 청계천을 건널 때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신호등을 무시한 채 건너다니기 일쑤인 광경에 잠시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하였다.

 

    기업은행 앞에 이르니 마침 차가 나를 반기듯 달려오기에 아무 생각 없이 일단 올라타고 보았다. 차 안에서 혼자 심심하게 앉아있기에는 무료하여 가벼운 책이나마 꺼내 들었다. 서울역을 지나면서 차내에서 두 남녀의 소리가 번갈아 나며 소란스러운 듯싶어 무슨 일인가 하여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가만히 그들의 하는 태도를 지켜보며 귀를 기울여 보곤 이내 마음이 환해짐을 느꼈다.

 

    한 아주머니와 어떤 아저씨 사이에 가벼운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야기인즉슨 아주머니가 승차하면서 버스 카드를 기계에 댔더니 잔금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설상가상으로 잔돈마저 없어 매우 곤혹스러워하는 아주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던 생면부지의 어떤 아저씨가 자신의 카드로 대신 차비를 치러준 것이다. 아주머니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극도로 고마움을 표했음은 물론 내려서 갚아드리겠다고 했지만 그 아저씨 또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거듭 사양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그런 경우가 있으면 도와주면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자신도 그런 경우를 당해보아 잘 안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질세라 그 아주머니도 자기가 서울역 KTX 상가에서 꽃을 파는 일을 한다며 언제 한번 꼭 들르시란다. 장미 한 송이라도 꼭 드리고 싶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박수라도 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마음으로만 쾌재를 부르며 무한한 애정의 박수를 보냈다. 연일 부정과 비리에 대한 소식으로 시끌벅적한 시기에 그래도 저러한 분들이 계시기에 이 사회가 살 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 싶었다. 출세한 어둠의 자식들보다 선량한 시민 하나가 내게는 더 소중하고 고마운 것이다. 그렇듯 모르는 이들에게도 기꺼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이들이 이 땅에 충만하였으면 싶다. 그 이름 모를 아저씨는 900원을 들여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형의 보배로운 선물을 우리 모두에게 선사한 것이다. 나도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저 그 분이 그 마음씀씀이 만큼이나 행복하시고 하는 일이 잘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을 뿐이다.

 

     (* 2009년 4월 2일 용두팔 게시판에 올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