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및 여행기/국내

서울둘레길 2코스 : 2016. 1. 16

지평견문 2016. 1. 17. 00:02


 

두 번째 서울둘레길 나들이에 나섰다. 집에서 920분쯤 출발하여 202번 버스를 타고 화랑대역에 도착하니 1040분쯤 되었다.


1코스를 마친 곳이 오늘은 시작점이 된다. 지난번에 유시유종(有始有終)을 체험했다면 오늘은 유종유시를 겪게 된 것이다. 만해 선생이 아니더라도 회자정리는 늘 그렇게 제행무상만큼이나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둘레길 2차 코스는 용마아차산 코스이다. 중랑구와 광진구 구간으로 총 12.6km로 소요시간은 5시간 10분 정도, 난이도는 중급으로 알려져 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둘레길을 가는 사람이 제법 눈에 띄었다. 그 중 한 부부가 둘레길 지도를 가지고 있기에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를 물었더니 서울시청에 가면 얻을 수 있다고 친절히 가르쳐 준다.


화랑대역을 출발하면서 하천을 끼고 도는데 백로 한 마리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면 상류로 날아가고 또 날아가기를 몇 차례 하다 보니 마치 백로를 촬영하기 위해 뒤를 좇는 형국이 되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먹이를 구하느라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하다. 저 신천옹(信天翁)이라는 새는 물가에 자리를 잡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지나가는 물고기를 잡는다고 한다. 그야말로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격이 아니던가? 그래서 하늘을 믿는다고 신천옹이라 했던 모양이다.


이제 조금 더 가니 이번에는 오리 두 마리가 유유자적하며 물살을 가른다. 장자나 혜시가 있었다면 그 오리들이 즐거울 것인지 어쩐 지를 시비를 삼을지 모르겠다. 한 쪽 밭두둑 나무에는 웬일로 까치들이 떼로 조작(朝鵲)거리고 있다. 자그마한 이름 모를 새들도 풀숲을 톡톡 뛰어다니며 재롱을 부린다. 분명 새를 보러 나온 것은 아니건만 아침[]부터 웬 새[]들이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우주의 한 조화(調和)려니 여기며 같이 즐길 만한 일이다.


둘레길을 따라 돌다보니 서울시립병원이 오른쪽으로 다가선다. 언젠가 지산 선생님께서 계실 때 들렀던 기억이 새롭다. 아직도 요양 중이시니 쾌차하시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해본다. 양원로 길에 들어서니 가로수가 메타세콰이어다. 중구에서 소나무 가로수를 내세우기 전 여기서는 일찌감치 특화한 낌새다. 그 끝자락에 송곡관광고등학교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양원역(養源驛)으로 꺽어졌다가는 다시 망원청소년수련관 앞에서 돌아선다. 인농(人農), 사람농사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양원은 근원을 기르는 것이요, 거기에 사람농사를 짓는 청소년수련관이 있으니 뭔가 궁합이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굽은 소나무가 눈길을 끌고, 담장의 붉은 열매가 유혹을 한다. 그렇다고 노류장화(路柳墻花)는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망우리 묘역에 들어섰다. ‘박인환선생묘소 500m'라는 표지판을 보고 찾아 나섰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500m를 가는 동안 길이 갈래져 좌우로 묘소가 즐비하니 박선생의 묘소를 찾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은 아니라도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야 할 듯 싶었다. 아쉽지만 목마와 숙녀는 나중에 인연이 닿으면 만나도록 하고 잠시 벗어난 둘레길에 다시 들어섰다.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바람에 몸을 맡기며 흩날리고 있었지만 쌓일 정도는 되지 못하였다. 그래도 어쩌다보면 입속으로 몇 개인가 들어가고 말아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높은 돌탑이 하나 나타났는데 <국민강녕탑>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었다. 사연인즉 용마산과 아차산 지킴이로 수십 년간 산속 쓰레기를 주워 오신 87세의 최고학(崔孤鶴) 옹이 국민의 강녕(康寧)을 위해서 혼자 쌓으신 탑이라고 한다. 성함에는 비록 외로울 고()자를 쓰고 있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우아한 학의 모습이 연상된다. ‘덕 있는 자는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라고 일찍이 공자가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아침부터 새를 많이 보게 되더니 오늘은 두루미[]하고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최고학 할아버지의 덕스런 돌탑을 본 지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작가 서해(曙海) 최학송(崔鶴松 : 1901~1932) 선생의 문학비와 묘소를 만난 것이다. <고국>, <탈출기>, <해돋이>, <홍염> 등의 문제작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 분의 작품을 본 기억은 없지만 이름만큼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하다.


서울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망우산은 해발 281.7m밖에 안 되는 나지막한 산으로 일제 강점기인 1933년부터 서울시 안에 있는 유일한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 선생을 비롯해 소파 방정환, 위창 오세창, 박인환, 지석영, 이중섭 등 유명 인사들의 묘역이 있다고 한다. 기회가 있으면 그 분들 묘역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성 싶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아내가 말아준 김밥을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빤히 쳐다본다. 그야말로 달라는 말보다 더 무섭지 않은가? 참 묘()한 고양이[]이다. 먹던 것을 뚝 떼어서 던져주니 조심스럽게 살펴보더니 달게 먹는다. 그러기를 세 번인가 했다. 그저 쥐나 잡으면 된다는 등소평의 흑묘도 백묘도 아닌 황묘였다. 망우리 묘역에서 묘하게 만난 고양이도 주린 배를 채우려고 어찌 근심인들 없었겠는가? 이제 너나 나나 근심을 한번 잊어 보세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동구릉 지역에 능역을 정해놓고 근심을 잊었다 해서 망우리(忘憂里)라 했다고 하질 않던가? 근심이 걱정이 되는 것은 임꺽정에게 맡기고 그저 우리 모두 근심이건 걱정이건 잊어버리고 즐겁게 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즐겁기를 바라면 다른 사람들도 그러려니 그들과 더불어 동락(同樂)할 것을 맹자에게 배움직도 하렸다.


대충 뱃속의 허기를 달랬으니 어찌 또 갈 길을 가지 않으랴. 시험장에서 할아버지를 호되게 비난한 시를 짓고 부끄러워 삿갓을 쓰고 다녔다는 김병연 시인은 아니더라도 모자를 눌러쓰고 또 남은 길을 그렇게 가야 할 터였다.


이제는 용마산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을 스텝 바이 스텝하면서 한 걸음씩 옮겨 놓아본다. 이렇듯 매사는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야 하지 계단을 뛰어넘어 엽등(躐等)을 해선 안 된다. 세상이 혼탁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혜택만 누리려는 자들 때문이기도 함은 역사가 말해준다. 깜냥이 되지 않으면서 요지를 차지하여 국가와 사회를 문란하게 하는 자들이 어느 시대이건 반드시 있게 되니 그것이 바로 뜻있는 이들이 한탄해마지 않게 되는 까닭이다.


용마산과 아차산에 오르다보면 곳곳이 사적으로 지정된 보루가 있다. 고구려 때 한강 유역의 요충지를 차지하고 지키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전망대나 보루 지역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한강을 비롯해 주변의 지형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 용마산 능선에 7개의 보루가 있다고 하니 그 중요성은 이미 역사 속에서 검증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둘레길에서 만나는 시()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안도현 시인의 <우리가 눈발이라면>이라는 시가 예사롭지 않게 마음을 파고든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하필 오늘 눈이 내렸다. 어찌 내가 눈 오는 날 여기를 들를 줄 알고 안 시인님은 이런 시를 지었으며, 구리시에서는 내 눈에 띄도록 이것을 전시하였을꼬? 안 시인께서 시인하지 않으셔도 나는 마치 나를 위해 지은 것이라 여기리라. 어차피 시는 시인을 떠나면 독자의 것이 되는 것이려니. 아전인수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 되려나?

일부 지역은 보루의 모습을 되살리려고 복원 작업을 시도한 곳도 있다. 그 때와 얼마나 그 모습이 닮았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방 자치화가 되면서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둘레길을 비롯한 각 지역의 특성화를 꾀하려고 하는 노력들이 많이 눈에 띈다는 점일 게다.


아차산(峨嵯山)에는 소위 아차산명물이라는 소나무가 있다. 사람들은 일부러 그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 할 만큼 멋진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지정된 명품 소나무 뿐 아니라 소나무 오솔길이 참으로 아늑하게 펼쳐져 있다. 등산을 어려워하는 분들에게도 아차산은 부담 없이 거닐기에 적합한 산으로 보인다. 산책로 정도로 여겨질 정도로 비교적 편안한 길이다. 아차산을 거닐다보면 곳곳에 고구려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얼마 전 혼이 비정상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되었지만 여기서는 그와 달리 고구려의 혼을 연신 강조하고 있다. 그러다 마침내 너럭바위들이 몰려 있는 곳에 고구려정(高句麗亭)이라는 결정으로 화룡점정의 정체를 드러낸다.

하산하면 입구 근처에서 온달과 평강공주로 보이는 동상을 볼 수 있고, 광장초등학교와 중학교 쪽 길을 따라 광나루역에 도착하면서 오늘의 코스를 마치게 된다. 내가 걷는 동안 시침도 열심히 돌아 오후 32분을 가리킨다. 4시간 22분이 걸린 셈이다. 예상 시간인 5시간 10분보다는 약 50분가량 빨리 도착한 것인데 사실 박인환 선생 묘소를 찾는 데 허비하지 않았으면 시간은 좀 더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