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반 고을 안동 문화권을 다녀오다 ② >
2010년 7월 24일 토요일 흐림
어제 밤 12시 반 쯤 술자리를 어렵사리 떠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으나 한 후배에게 문자가 오기에 답장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아직 잠들지 않았다고 공개한 셈이어서 득달같이 오는 전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졸지에 잠드는 시기를 놓친 것 같다. 억지로 눈을 붙여보지만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해 전전반측하다 겨우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잠은 다소 부족했지만 습관상 아침 일찍 눈이 뜨이니 이제 누워 있는 게 조바심이 났다.
8시부터 식사를 하기로 했으니 기다리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준비해 간 책자를 들고 뒤 곁으로 가니 농구장이 있고 건너편 가로질러 가산서당(可山書堂)이 있었다. 가산서당은 안동지역 최초의 중등교육 기관으로 1907년에 설립되었다는 협동학교(協同學校)의 교사로 쓰였다고 한다. 3.1운동 당시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앞장섰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았다고 하는 데서 그 곳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들어선 까닭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마루에 걸터앉아 책을 읽다가 뒤미처 나온 다른 사람들과 일행이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나마 경내를 둘러졸 기회를 가졌다.
아침은 북어국이 선을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전날 술자리가 있었을 것임을 짐작한 배려 속에 이루어진 해장용 식사인 듯싶었다. 자판기에서 꺼내든 모닝커피가 따스한 체온을 고스란히 목 줄기를 타고 넘어간다. 잠시나마 기념관 내부를 서둘러 둘러본 다음 9시가 조금 넘어 오늘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버스는 다시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였다.
머잖은 곳에서 영호루(映湖樓)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수를 비춘다는 의미를 머금은 영호루는 누가 언제 건립하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천여 년의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유실과 중창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장소도 조금 옮겼지만 그 명성은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수(漢水 : 한강) 이남의 대표적 누각으로 알려져 있다. 영호루는 사방으로 조망이 확 트여 주변을 둘러보기에도 좋지만 정작 볼만한 것은 영호루 누각 안쪽에 걸려 있는 수많은 현판들이었다. 정몽주, 김종직, 이황을 비롯한 여러 명망가들이 읊은 시들이 사방에 빼곡히 둘러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 때문에 현판을 요목조목 미처 다 돌아볼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긴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시 버스에 승차하여 이동해 간 곳은 안동민속박물관이다. 민속박물관은 실내와 실외의 이원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우리는 우선 실외부터 둘러보기로 하였다. 도자기를 굽는 도요부터 축력을 이용하여 돌리는 돌방아를 시작으로 한참을 걸어 다니며 박물관 안을 살펴보았다. 일반 가옥부터 귀틀집, 복원된 기와집 따위를 두루 살펴보았는데 특이한 것은 역시 지붕위에 까치구멍을 낸 것이었다. 집안의 퀴퀴한 냄새를 밖으로 유출하기 위해 지붕 용마루 부근 양쪽에 숨구멍을 낸 것인데 중부지방에서는 전혀 본 일이 없기에 더욱 신기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실내 박물관은 아래층에 서민과 관련된 것들을 진열하고 위층에 양반문화와 관련된 것들을 배치하여 구분하고 있었다. 마침 해설사 한 분이 다가오셔서 진열품들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중 특이한 설명 하나가 귀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도리도리’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깨우치라는 것이고, ‘곤지곤지(困知)’하는 것은 살다보면 곤란을 겪기도 한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며, ‘잼잼’은 조금씩 모아 부를 축적하라는 가르침이라며 설명하는 데는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재미있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던 때문이다. 일순간 제주도에 갔을 때 건널목에 ‘도리도리 길 건너기’라는 문구를 보고 재미있어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허나 이 구경 저 구경 다 좋지만 밥 구경이 첫째라. 버스를 타고 자리를 옮겨 한 식당을 찾아들었다. 여기도 안동 간 고등어집이다. 어떻게 된 게 고등어는 다 안동만 가는 모양이다. 서울 간 고등어나 아니면 안성 간 고등어도 먹어볼 만하련만. 그래도 이번에는 찐 고등어도 함께 나왔고, 빈대떡이 곁들여졌다. 여기에 동동주가 빠지면 서운할 것이 분명한 터라 이 역시 예의 구색을 맞춘다.
배도 적당히 부르려니와 월영교(月映橋)의 멋진 풍광에 잠시 강가를 둘러보았다. 달빛이 비추는 다리라면 야경이 더 근사할 것이건만 어차피 그런 호사까지 누릴 겨를은 없지 않던가. 다리 위에는 다른 다리에서 볼 수 없는 정자가 하나 덩그마니 올라가 있었다. 얼마 전부터인가 한강 다리 위에 조망대인지 카페인지 생기고 있는데 이곳 정자를 보니 운치가 이만 못하지 않나 싶었다. 어쩌면 서울의 그런 시설물도 이런데서 배워간 것은 아닐런지. 시간 관계상 월영정까지는 미처 가보지 못 하였지만 다리에는 잠시 올라보았다. 강가에 있을 때와 달리 시원한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중간쯤에 혹처럼 삐죽하게 튀어나온 설치물이 있어 그곳으로 발을 옮겨 강을 내려다보니 밀려오는 잔잔한 파문(波紋)에 마치 배를 타고 가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래도 이곳 안동에 왔으면 꼭 찾아가야 할 곳이 있다. 고금을 통 털어 안동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라면 단연 퇴계 이황(李滉) 선생이 아니시던가. 내가 사는 근처인 남산에도 퇴계 선생의 동상이 있지만 아무래도 그 분의 흔적은 안동에서 찾아야 제격이다. 선생이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로 고치고 만년에 은퇴하여 살며 제자를 양성한 곳이 바로 도산서당(陶山書堂)이다. 도산서원은 뒷날 제자들에 의해 도산서당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던 것이고 실상 퇴계 당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퇴계는 문과에 급제하여 고위 관직인 우찬성에까지 이르렀지만 비교적 벼슬에는 담담한 편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에게는 친형인 이해(李瀣)가 을사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던 아픈 추억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위 ‘난진이퇴(難進易退)’, 나아가기는 어려워하고 물러가기는 쉽게 하는 모습을 견지하였다. 그가 양성한 제자가 대략 360여 명이 된다고 하는데 그 중 서애 유성룡이나 학봉 김성일 등이 걸출한 편이었다.
주차장에서 도산서원을 향해 걷다 보면 길옆에 공자의 후손이 다녀가며 남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글씨가 눈에 확 들어온다. 맹자가 태어난 곳이 추(鄒)나라이고 공자의 고국이 노(魯)나라이니 퇴계가 태어난 영남을 추로지향이라고 한 것은 다 그런 데서 연유한 것이다. 안동 양반 문화의 중심에는 바로 퇴계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은 크게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앞부분이 도산서당이라면 뒤쪽이 도산서원이다. 도산서당에는 매화가 심겨 있어 매화를 좋아했던 퇴계의 마음을 엿보게 한다. 서당 곳곳에는 선생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흔적들이 여기저기 고스란히 배어 있다. 퇴계가 20여 세나 어린 기대승과 7년여 동안 사단칠정론에 대해 논한 것은 조선 철학사의 기념비적인 일화거리였다. 그가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 또한 그의 학문적 성향을 보여준다. 율곡의 주기론(主氣論)과 달리 흔히 주리론(主理論)의 대표자로 일컬어졌던 퇴계는 생활에 있어서도 ‘경(敬)’을 강조하며 상당히 신중한 처신을 보였던 도학자였다.
도산서원의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어제 아드님 집에 가셨던 지산 선생님께서 되돌아오셨다. 1학년 반장 등이 뒤늦게 서울에서 내려와 수련회에 합류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일이 있어 먼저 상경하기도 하였다.
도산서원을 뒤로하고 다음엔 장소를 옮겨 퇴계 종택에 잠시 들른 다음 퇴계태실을 찾아 나섰다. 퇴계의 후손께서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셨고 우리는 마루에 둘러 앉아 대학서문(大學序文)을 성독(聲讀)하였다. 성독이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말하는데 우선 취암 선생께서 선창을 하시면 우리 모두 이를 따라 읽었다. 처음 한번은 짧게 끊어서 읽었고, 두 번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 내어 통독하였다.
퇴계 선생이 태어났다는 태실을 관람하며 일부, 특히 여학생들은 그곳에서 기를 받아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나이 드신 한 분이 그 곳에 들어가니 연세 드신 분이 무엇 때문에 욕심을 내시냐고 농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학봉 종택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수박 대접을 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들었다. 나오는 길에 발견한 한 아름도 훨씬 넘는 밤나무가 또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느티나무나 은행나무라면 모를까 그렇게 큰 밤나무를 보기는 또한 생전 처음이었다. 그래서 같이 사진을 찍자는 제자들의 요청에 두말없이 포즈를 취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원래 일정에 포함되었던 퇴계묘소 참배는 닭실마을 탐방으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4시 10분이 조금 넘은 시각에 우리는 퇴계 선생의 전설을 뒤로한 채 이제 봉화에 있는 닭실마을을 향했다. 닭실마을이란 특이한 명칭은 이곳이 풍수지리상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이란 데서 생긴 명칭이라 한다. 5시쯤 닭실마을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을 받은 관계자 분들이 반가이 우리를 맞는다. 수인사를 마치고 박물관에 들러 충재(冲齋) 권벌(權橃) 선생과 관련된 유품들을 돌아보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후손이신 분은 병색이 완연하건만 일부러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시러 나오셨다고 하니 그저 감읍할 뿐이다. 지산 선생님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마침 같이 간 2학년의 권군의 아버님이 이곳 출신이라 하니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박물관을 나와 청암정(靑巖亭)으로 자리를 옮기니 거북 바위 위에 정자가 아담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역시 닭실마을 권씨 집안의 일원인 권율이라는 분의 설명에 의하면 처음 충재가 거북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방을 꾸며 잠을 자고자 하였으나 귀신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가던 중이 거북이 등에 불을 땠기 때문에 귀신소리가 들리는 것이라며 불 때는 방을 없애고, 정자 주변에는 거북이 마실 수 있는 물이 있게 하라고 하여 빙 둘러 연못을 파게 된 것이라 한다. 전설을 곧이곧대로 믿을 것은 못된다고 하더라도 말인즉슨 그럴 듯하였다.
전서체로 쓴 청암정이라는 현판이 예사롭지 않다 했더니 바로 미수 허목(許穆)의 글씨라고 한다. 미수가 인편을 통해 보내왔다고 하는데 현판이 도착하기 전 미수의 부음이 먼저 도달했다고 한다. 결국 현판의 글씨가 미수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는 데는 현판을 다시 한 번 올려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연못 위에는 정자를 연결해주는 돌다리가 가로질러 놓여있는데 제법 예쁘고 아담하였다. 정자와 연못, 돌다리 등이 주변의 나무들과 한데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해설자의 말에 의하면 요즈음 한참 방영중인 ‘동이’를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동이가 무엄하게도 엎드린 숙종의 등을 타고 올라 담장을 넘는 장면도 바로 여기에서 촬영했다고 목청을 높인다. 닭실마을에서 다음 행선지인 봉화향교를 찾을 때는 해설사 분도 함께 동행 하였다.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에 있는 봉화향교는 세종 때 창건되어 선조연간과 일제 때 중건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봉화향교는 다른 곳의 예사 향교와는 그 형태가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는 문이 하나뿐이고 양쪽에 창문처럼 두 개가 가로 형태로 달려 있는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를 두고 반 농담 형식을 띠며 무성한 추측성 발언이 난무했지만 정작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분명 다른 향교와는 유별난 점이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눈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이제 오늘의 답사 일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청봉 숯불 갈비집을 찾았는데 바로 그 근처에 철로 된 비석이 있다 하여 잠시 둘러보니 누군가의 ‘영세불망비’였다. 정말 영원토록 잊지 못하고 기억할 정도로 선정을 베풀었는지, 아니면 또 하나의 민폐를 끼친 것인지는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구태여 철로 비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는 의문만이 머리를 감돌 따름이었다.
저녁을 마친 다음에는 숙소로 정해진 영주의 선비촌으로 향했다. 우리와 헤어지기 전 해설사의 말씀이 걸작이다. 안동에서는 ‘양반고을’이라는 명칭을 쓰고 영주에서는 ‘선비촌’이라는 말을 가져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봉화에서는 ‘예절의 고향’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지방 자치가 활성화되는 시기에는 이런 브랜드도 남보다 먼저 재빨리 확보하는 게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선비촌에 들어서자 우리 일행은 세 구역으로 나누어 배정된 각자의 숙소로 이동하였다. 인동 장씨 고가(古家)에는 선생님들이 거처하시도록 했고, 일부는 두암 고택과 또 다른 한 곳에 각각 머물게 되었다. 샤워 실을 겸한 화장실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 다소 불편하였으나 모처럼 고가를 체험하는 것도 괜찮을 성싶었다.
9시쯤 되었을 무렵 거개가 중간 지점에 위치한 두암 고택 대청마루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오늘이라고 그냥 넘어갈 리 없잖은가? 급조된 조촐한 임시 주석이 마련된 것이다. 공간 관계상 어제처럼 노래를 곁들일 수는 없었지만 주로 옆의 몇 사람들과 환담을 하며 어느 정도 주흥이 무르 익어가는 가운데 간간히 웃음소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밤이 깊어갈 수록 하나둘 자리를 빠져나갔고 12시를 전후하여 거의 자리가 파하게 되었다. 선비촌의 달이 구름 속을 반복적으로 드나들며 숨바꼭질하는 가운데 차츰 선비들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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