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者樂山[등산]/백두대간

< 백두대간 : 삿갓재대피소 - 빼재 >

지평견문 2012. 8. 19. 21:45

   < 백두대간 : 삿갓재대피소 - 빼재 >

 

    참여자 : 송재혁(芝山), 오진탁(星巖), 이장원(高山), 정재민(巨谷), 김세봉
    구간 : 삿갓재 대피소 - 빼재
    산행 시간 : 10시 45분(중식 및 휴식시간 포함)
    산행 거리 : 19.4km


    2010년 1월 25일 월요일 새벽에 눈 내리다 갬

 

    어제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며 새벽 4시에 기상하기로 하였다. 다른 친구들보다 약 30분 정도 먼저 일어나 밖에 나가 바람도 쐬고 볼 일을 보았다.

 

   4시를 전후하여 친구들이 일어나고 분주히 아침을 준비한다. 나는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청해서 샘으로 물을 길러 갔다. 다른 것들을 챙기는 동안 고산이 먼저 샘터를 찾아 나섰다. 그는 샘을 지나쳐 엉뚱한 곳까지 한참을 갔다가 내가 도착할 무렵 겨우 샘물을 찾았던 모양이다. 고산을 먼저 올려 보낸 다음 물을 긷고 되돌아 올라오는데 무엇인가 앞에 기척이 느껴진다. 어느 새 일어났는지 산토끼 한 마리가 덩그마니 앞쪽 계단에서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웅숭그리고 있다. 토끼가 놀랄세라 조금 기다리니 이내 한쪽 숲으로 사라져갔다. 덩치가 큰 멧돼지라면 공포심을 느꼈겠지만 그래도 자그마한 토끼여서인지 오히려 연민의 정을 느끼게끔 되었던 것 같다.

 

   아침 준비를 하는 데는 주로 지산과 거곡이 수고를 많이 하였다. 서둘러 조반을 마치고 5시 55분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우리는 산장을 출발하였다. 바람이 씽씽 불어대며 예사롭지 않은 인사를 해오는데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눈발마저 날리고 있었다.  아직 여명이 가시지 않은 시간대라 모두 헤드랜턴을 하고 산장을 뒤로 한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렬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언제나처럼 나는 제일 뒤쪽에서 친구들의 꽁무니를 이어갔다.

 

   원래 쌓여 있던 눈에 또 눈이 보태지니 설상가상(雪上加霜)은 아니라하더라도 설상가설(雪上加雪)이라 할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장애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움을 보태주는 장치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있지도 않은 낙상가락(樂上加樂)이라는 단어로 억지 표현을 써도 좋을 듯싶었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은 마치 우리를 날려버릴 듯 거세어 때로 몸이 휘청대기도 하였지만 설중 산행의 즐거움을 앗아갈 정도는 되지 못하였다.

 

   6시 50분쯤 우리는 무룡산(舞龍山)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무룡산은 거창군 북상면 산수리와 무주군 안성면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옛 이름은 불영봉(佛影峰)이었다고 한다. 내 고향이 안성이다 보니 다른 데 또 안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게 여겨졌다. 내겐 해발 1492m라는 숫자도 예사롭게만 보이지 않았다. 역사를 공부하는 내게는 그 숫자는 늘 조선 건국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는 까닭이리라. 산 이름을 따르면 춤추는 용이라도 있어야 할 법한데 친구들은 무(舞)를 무(無)로 보아 ‘용(龍)’이 없다고 누군가 하나 남아 있어야 한다며 나를 지목한다. 그렇다고 남아 있을 수도 없으니 눈 위에 ‘용(龍)’자를 크게 써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날이 밝아오면서 설원(雪原)의 광경은 더욱 빛을 발했다. 그야말로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하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다. 하늘과 땅을 온통 뒤덮은 백색의 현란한 향연에 나무들은 온통 백설기가루를 뒤집어쓴 채 신세계를 창출하였다. 예닐곱 발작을 가다간 그 자리에 멈추어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친구들에게 이미 반백의 나이테는 어디에도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엔 그저 몸집 큰 어린아이의 세계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원래 상고대가 형성되었다가 그 위에 다시 눈이 덧쌓여 이루는 장관은 그야말로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지금까지 백두대간을 하던 중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었고 앞으로도 또 그런 일이 있을까 싶었다.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우리의 백두대간 산행 기간 중 백미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거곡과 성암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오랜만에 산행을 하게 되었다는 고산도 그런 의사를 은근히 내비친다. 오늘 최종 도착지인 신풍령까지 온전히 가게 될 지 불투명해지는 상황이 서서히 도래하고 있었다. 지산과 나는 웬만하면 오늘 목표를 소화해내 완주할 생각이 있었지만 친구들과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송계사 삼거리까지 가 본 다음 결정하자는 말로 유예가 된 것이 실날같은 희망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동엽령(冬葉嶺 : 8시 50분쯤)을 지나며 잠시 간식을 들었다. 동엽령은 거창과 무주 사이에 토산품을 교역하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라 하는 데 정작 ‘겨울 잎’을 뜻하는 ‘동엽’이라는 지명은 유래가 불분명하다. 신동엽은 혹 알고 있으려나? 그가 개그맨이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던 시인이든 만날 일이 없으니 어차피 알아보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10시에서 5분이 지난 시간, 우리는 마침내 운명의 갈림길인 송계사 삼거리에 다다랐다. 백암봉(白巖峰 : 1420m)이라고도 했다. 거곡과 성암은 향적봉에서 내려가기로 하고 고산도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고심 끝에 지산과 나는 계속 종주하기로 했다. 그러자면 송계삼거리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헤쳐 모이기로 하고 식사를 하려니 바람이 센 관계로 점심을 먹기에 적당한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고산이 힘들게 짊어지고 온 떡으로 간단히 배를 속이기로 하고 점심은 적당한 때에 해결하기로 하였다.

 

   떡으로 가볍게 배를 채운 다음 아름다운 이별을 하였다. 세 친구는 먼저 내려가 샤워도 하면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하고 지산과 나 둘은 신풍령까지 완주한 다음 그곳에 있는 성암의 차를 타고 무주리조트로 가는 입구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아마 한 명만 먼저 내려갈 형편이었으면 우리도 같이 가야 했겠지만 그렇지 않은 데다 성암과 거곡은 그래도 평소 시간적 여유가 많아 남은 부분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둘만이라도 완주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가능케 하였다.

 

   세 명이 향적봉을 향해 가는 것을 보고 지산과 나는 서둘러 신풍령 쪽 길을 잡아 발걸음을 빨리 했다. 송계 삼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몇 명 만난 것 외에는 사람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지산과 둘이서 가면서부터는 신풍령까지 단 한 사람의 그림자도 접하지 못했다. 혼자서라면 다소 외로웠을 산행이지만 그래도 둘이나마 같이 가게 되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가끔은 온 길을 되돌아보며 빼어난 산세를 감상하기도 하였다. 하얀 눈으로 인해 마루금이 보다 뚜렷해지면서 덕유산은 웅장하면서도 푸근한 자태를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11시 17분에 귀봉을 지나쳤고, 11시 53분 경에 횡경대에 이르렀다. 앞서 가던 지산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등산화를 들여다본다. 아이젠에 큰 돌이 틀어박혀 가뜩이나 무거울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는 데야 그냥 갈 수 없지 않은가? 툭툭 털어보기도 하고 손으로 잡아 떼어보기도 하지만 돌이 제법 단단히 박혀 있다. 이 방법 저 방법을 써보다 큰 돌에 누차 두드리고 나서야 겨우 돌이 빠져나왔다. 돌로 돌을 두드려 돌을 빼냈으니 이석치석(以石治石)이라고나 해야 할까? 하여간 치석(齒石) 같은 존재를 빼어내니 한결 가뿐하다고 한다.

 

   12시 40분. 언덕바지를 오르니 헬기장이 입을 쩍 벌리고 맞아준다. 뒤돌아보니 멀리 향적봉과 무주리조트 스키장이 눈에 들어왔다. 지산은 하나의 보물이라도 더 담아가려는 듯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머잖은 곳에 못봉(1342m)이 있었다. 거창 지역이다. 봉우리가 못[釘] 같이 생겨 정해진 이름 같았다. 시간도 그렇고 해서 못봉 주변에서 점심을 들기로 하였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예의 그 비상식을 꺼내놓고 식사를 하였다. 이미 약 40여 분 전에 물을 부어놓은 상태라 먹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산은 웬일인지 반 정도 먹고 숟갈을 내려놓는다. 별로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오후 1시 45분, 월음재에 도착하였다. 달음재라고도 한다는 것으로 보아 월은 달 월(月)자 임에 틀림없다. 신풍령까지는 아직도 4.7킬로미터나 남은 상태였다. 달음질이라도 하면 좀 더 빨리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 온 것만큼 발걸음이 무거워지면 무거워졌지 가벼워질 공산은 아예 생각을 접어야 할 것이었다.

 

   2시 35분경 대봉에 올라섰다. 그런데 리본들이 별로 보이지 않아 괜스레 엉뚱한 길로 접어들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으나 지도를 읽는 독도법에는 지산이 또 일가견이 있지 않던가. 지산이 앞장 서 길을 잘 인도하여 3시 10분에 갈미봉(1210.5m)에 이르러 잠시 앉아 남은 간식을 먹었다. 송계삼거리에서 헤어질 때 거곡이 넘겨주고 갔던 비상식을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4시 12분쯤 빼봉을 지나 4시 40분 경 마침내 오늘의 산행을 마치기로 한 신풍령에 내려섰다. 신풍령은 다른 말로 빼재라고도 하는 데 돌 이정표에는 ‘수령(秀嶺)’이라고 하여 빼어날 ‘수(秀)’자를 쓰고 있었다. 빼재라고 하는 것도 ‘빼어나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몸이 빼어난 황중산(黃中山) 기수(己秀)가 보면 꽤나 좋아했을 법하다.

 

   지산이 성암의 차를 운전하여 먼저 하산한 세 친구를 만나러 갔다. 한참을 찾다가 결국 고산이 마중까지 나온 가운데 우리는 한 식당에 들어섰고 이산 친구들이 만나 화기애애한 가운데 저녁을 마치고 상경 길에 들어섰다. 2박 3일의 여정 가운데 친구들의 전화 또는 문자가 반갑고 고마운 가운데 우리의 덕유산 구간은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게스트로 참석한 고산은 단 한 차례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백두대간 산행의 백미라 할 멋진 광경을 체험했으니 한번을 해도 제대로 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