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者樂山[등산]/백두대간

신백두대간 1-1 : 복성이재-중고개재

지평견문 2013. 3. 17. 23:57

 

< 권토중래(捲土重來) >

 

   몇 년전 고등학교 동기 4명이 백두대간 산행을 한 적이 있지만 1/3 정도를 소화했을 뿐 중도에 그치고 말았다. 네 명 중 한 명이라도 무슨 일이 있게 되면 아무래도 계속 진척되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래서 재개를 희망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그저 아쉬움만 남긴 채 몇 년이 그냥 흘러갔다. 차제에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을 4년여 남긴 시점에서 백두대간 종주가 기획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오늘 그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이른 아침 거의 같은 시간 두 대의 차가 서울을 빠져나갔다. 태릉역을 출발한 차는 중부고속도를 거침없이 달렸던 반면 강남역을 출발한 차는 경부고속도로를 진입했는데 어쩐 일인지 다소 지체가 되었다. 아마도 3일 연휴의 여파일성 싶었다. 그들은 죽암휴게소에서 잠시 만나 무슨 이야기인가를 주고받고는 이내 다시 두 차에 나누어 탄 채 어디론가 달려갔다. 이제만군이 모는 강북차에는 김성권, 이동관, 송재혁, 조병국, 황기수 등 6명이었고, 용두팔 산악회 회장인 박찬정군이 부리는 강남차에는 김규일, 박돈에 나까지 4명이었다. 이렇듯 총 10명은 이제 60을 바라보는 중년의 나이에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들 10명은 씽씽 차를 달린 지 몇 시간이 지나 육십령이라는 다소 묘한 이름의 고개에 차를 세웠다. 그들은 트렁크에 적당히 포개진 배낭들을 내리고는 무엇인가 기다리는 눈치가 역력했다. 잠시 승용차도 트럭도 아닌 정체불명의 차가 그들 앞에 나타나고 그들은 그들을 실어나른 두 대의 차를 미련없이 버려두고 그 차에 올라탔다. 일부는 의자에 앉았고 나를 포함한 일부는 짐칸에 적당히 둘러앉아 또 어디론가 그렇게 정처없이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서 그들이 내려선 곳은 복성이재라는 곳이었다. 이제 서서히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들을 그곳까지 태워다 준 기사 분에게 부탁을 하여 단체 사진을 하나 찍게 된다. '백두대간종주'라는 붉은 글씨가 노란 깃발을 내세우면서 그들의 정체는 백일하에 드러났다. 얼굴만큼이나 각자 다른 일들을 하고 있는 그들이 예 모인 것은 바로 소위 그 '백두대간종주'라는 대장정에 동참하기 위해서임이 확연해졌다. 미소기가 담긴 표정에는 기대와 의지가 한껏 묻어난다.

 

 - 앞줄 좌에서 우로 지산 송재혁과 약산 김규일

 - 뒷줄 좌로부터 포곡 조병국, 달마 김성권, 이동관, 중산 황기수, 화산 박찬정, 지평 김세봉, 박돈, 이제만

 

 

- 출발에 앞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전북 남원시 아영면과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복성이재. 이곳이 우리의 백두대간 종주의 출발점이 되었다. 사실 백두대간길을 북진하려면 지리산 천왕봉을 먼저 가야 했지만 지금은 그곳이 산불방지기간으로 출입이 통제되기 때문에 부득이 이곳을 먼저 오르게 되었다.

 

 

 

   대장정을 시작하는 날이 마침 3월 1일이라 우리는 출발에 앞서 먼저 순국선열들에게 묵념을 하기로 하였다. 아직 100년도 되기 전 3월 1일 우리 선조들은 맨주먹으로 일제에 항거해 독립만세시위를 외쳤다. 그 이후 상해 임시정부가 생기고 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분들이 풍찬노숙을 하며 인고의 세월을 겪고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였기에 그나마 오늘의 우리 산행도 가능한 게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제 허리가 동강 난 불완전한 독립 국가의 등 줄기를 3년여 기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체험해가면서 조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출발에 앞서 우리의 다짐도 구호를 통해 공유하기로 하였다. 용산고등학교 28회의 산악회 모임인 용두팔산악회에서만 들을 수 있는 '두팔 두팔 용두팔'의 구호느 그렇게 복성이재에 높게 울려퍼졌다. 이 구호는 '만세 만세 만만세'의 리듬을 타고 교가의 끝 가사에 나오는 '하나가 되자'라는 의미를 은연 중 보여주는 우리들만의 정서가 듬뿍 담긴 가슴 뜨거운 부르짖음이다. 

 

 

   우리는 복성이재를 출발한 지 불과 20여 분 만에 매봉에 도착했다(12 : 22, 712m). 흔하디 흔한 게 매봉이다. 응봉이나 수리봉 따위가 사실 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조금만 매나 수리처럼 생기면 그러한 이름으로 쓰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같은 이름이 난무한다고 해서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할 게 못 된다. 이곳이 철쭉군락지이고 보면 철쭉이 제철을 만나면 그 붉게 타오르는 정경이 색다를 것이지만 처음부터 너무 감흥에 젖으면 발길이 늦어질 수도 있으리라.

 

  - 봉화산 전망대

 

 

 

   매봉에서 봉화산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매봉은 복성이재에서 봉화산까지 가는 데 지루함을 덜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의 역할을 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봉화산까지 가는 데도 비교적 발걸음이 가벼웠다. 봉화산에 올라서니(13 : 39, 919m) 좀 더 시야가 확 트인다. 매봉은 남원시에 속했지만 봉화산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ㅅ 아영면, 경남 함양군을 아우르고 있다. 봉화산이란 이름도 특이할 게 없는 이름이다. 통신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통시대에 연락 수단이었던 봉화를 올린 데서 비롯되었음은 물론이다. 보통 봉화대는 다섯 개가 있어 평화시에는 한 개, 적이 보일 때는 두 개, 적이 국경에 접근할 때는 세 개, 적이 국경을 넘을 때는 네 개, 아군과 접전이 이루어졌을 때는 다섯 개를 올리게 되어 있다.  이렇듯 갯수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밤에는 불을 피워 알리지만[봉(烽)] 낮에는 연기를 피워[수(燧)] 봉수(烽燧)라고 한다. 가시 거리라는 조건이 형성되어야 하지만 이 또한 일종의 무선 통신이었던 셈이다.  관운장이 오나라 여몽군에게 패한 것도 여몽군이 봉수군을 먼저 제거했기 때문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봉화산을 향해

 

 

 

 

 

 

 

 

   우리의 앞길은 거의 무인지경이었다. 그런데 봉화산에서 처음으로 인류를 만났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그들인데 여자분은 헝겁 조각을 북북 연신 찢으며 무슨 주문이라도 외는 듯 했다. 인공위성이 우주를 헤집고 다시는 시절에도 무속은 무속대로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연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어쨌든 그 분들 덕분에 우리는 단체 사진을 부탁할 수 있었다. 봉화산을 내려서자 봉화산 쉼터가 우리를 맞는다. 어지간히 시장한 터라 백두대간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나오게끔 되었다. 바람이 세차게 몰아붙였지만 그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그나마 바람이 덜 부는 곳을 골라 자리잡았다. 몇몇 친구가 라면을 끓어댄다 밥을 한다며 분주하다. 그런 가운데 지산은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사정상 오늘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문로가 전해 준 토스트를 먹었던 까닭에 그나마 견뎠지 이른 아치을 먹은 뒤라 점심이 한참 늦은 셈이었다. 거의 오후 2시가 다 되어 점심을 준비하며 먹기까지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 그나마 달마가 득의에 차 장만한 점심은 김삿갓이 한탄했던 바로 그 삼식십(三十食 : 설은 밥)이 되었지만 시장기 앞에는 그 또한 왕후장상의 식단이었다.

 

 

 

    < 유무명봉(有無名峰) >

 

   적당히 배도 속였겠다 다시 행군이 시작되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우리는 얼토당토 않은 상황에 직면했다. 우리 앞을 막고 나선 것은 무명봉(817m, 15 : 07)이었다. 한자로 쓰여 있지는 않지만 거의 무명봉(無名峰)일게 틀림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게 뭔가? 말인즉슨 이름없는 봉우리라는 것인데, 이 이름이 곧 무명봉이 아닌가? 그러면 도대체 이것이 이름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름이 없는 것인가?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에 고소를 금치 못하게 되었다. 하기야 산행을 하면서 이런 재미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야말로 의외의 소득일시 분명하다.

   이름이 없어 이름이 없다는 이름을 얻은 무명봉. 그래서 한번 더 쳐다보고 한번 더 생각하며 무념의 산행을 이어가보는 것 또한 상쾌한 일의 하나라고나 할까? 사실 유명이면 어떻고 무명이면 어떠랴만은 그것이 백두대간에 놓여 있어 이를 지나치는 이들의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가스에 가려 조금은 아쉬운 가운데도 멀리 바라보이는 산야가 마냥 정답기만 하다.

 

 

 

  자 그러면 또 떠나드라고. 광대치(16 : 22)를 지나 약초시범단지를 만나 철책을 끼고 앞서 간 친구들을 부지런히 따라잡는다. 그러더니 이제는 월경산 갈림길(981m, 16 : 54)이 우리의 갈길을 지시해준다. 그런데 한글로 만 되어 있는 이정표를 만날 때 가끔은 한자가 병기되었으면 대략 그 뜻이나 그에 서린 역사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기도 하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그래서 때로 글자만 보고 엉뚱한 생각들도 한번씩 하기도 하며 객적은 웃음을 바람에 실어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산행에서 종종 만나는 조릿대 또한 반가운 존재 중의 하나이다. 경기 지역에서 자란 탓에 뒷동산에서 구경을 해본 적이 없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치미는지 모르겠다.

 

 

  이어 중치(650m, 17 : 36)를 지나 다시 중고개재(586m, 18 : 12)를 만났다. '치'도 고개요, '재'도 고개인데 '중치'는 무엇이고 '중고개'는 또 무엇이며, 더구나 '중고개재'는 무엇인가? 무명봉에서의 혼선은 여기에서 다시 한번 거듭되고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중고개재를 정점으로 일단 첫 산행인 오늘의 일정을 모두 소화하였다. 이제 우리가  하루 묵으며 지친 몸을 누일 숙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행지까지 우리를 실어다 주었던 그 분이 다시 우리를 맞으러 예의 그 차를 끌고 오셨다. 다행히 숙소는 머잖은 곳에 있어 금방 도착하였다. 숙소 이름은 중기민텔이었다. 중기는 마을이름이요, 민텔은 민박을, 텔은 호텔의 텔자를 따다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 민박집은 구면이다. 몇 년 전 백두대간을 한답시고 네 명(오진탁 교수, 정재민 교수, 송재혁 사장과 함께)이 머물던 곳이다. 오늘은 인원이 늘었다. 그래서 두 방에 나누어 몸을 풀게 되었는데 나는 우리가 잤던 그 방에 그대로 머물기로 했다. 방에는 사방에 낙서가 그득하여 이곳을 다녀간 이들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우리도 그 때 뭔가 남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 한참을 살펴보다 겨우 찾아냈다. 우리의 이름은 담겨 있지 않았지만 분명 우리들임을 나타내는 글귀를 만난 것이다.

 

    " 합의점을 못 찾는 토론으로

      시끄러운 백두대간을 만드는

      용두팔 산악회 2009. 12. 26"

 

    반가웠다. 내용은 좀 생뚱맞기는 하지만. 내용상으로 보아 아마 정재민 교수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토론으로 시끄럽게 했다는 것은 아마 나와 송사장 간에 정계에 대한 의견이 달라 이야기를 주고 받은 것을 두고 하는 말인양 싶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업을 하는 송사장이 다소 보수적 성향이라면 거기에서 한 발치 떨어져 있는 나는 진보적 색채를 띠어 견해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 시대의 당연한 현상일 시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다시 백두대간을 시작하며 참여한 것은 넷 중 송사장과 나뿐이니 재미있지 아니한가?

 

    하여튼 그 낙서 때문에 또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역시 그것이 낙서일망정 기록이라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마디 되지 않는 그 기록물을 통해 당시의 사실이 어느 정도 투영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여 준다는 점이다. 당장 날짜만 해도 그렇다. 그 때가 2009년 겨울철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하니 아마 그것을 못 보았더라면 제대로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숙소 도착

 

 

 

 

    다소 피곤하다한들 그대로 바로 잠자리에 들 친구들이 아니다. 간단히 저녁을 마치고 술잔이 오가는데 규일이가 가져온 로얄살루트 21년산은 단연 인기절정이다. 아쉬운건 5월말까지 의사에게 금주령을 당한 나는 정작 한 잔도 입에 댈 수 없었다는 점이다. 왜 안 마시냐는 물음에 구차하게 그것을 설명까지 하여 할 부담까지 걸머진 채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백두대간의 첫날은 신고식을 끝으로 내일의 여정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 울산서 김규일이 공수한 로얄 살루트 21년산 (* 이상 사진은 포곡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