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및 여행기/오십보백보

도보환향(徒步還鄕) (2)

지평견문 2014. 1. 26. 17:07

     〇 도보환향(徒步還鄕) (2)

 

   2007년 9월 23일 일요일 맑음(둘째 날)

 

  조카며느님이 끓여준 찌개에 곁들여 아침을 먹고 조카집을 나선 게 6시 40분이었다. 조카며느님이 가시다 드시라며 복숭아 1개, 사과 1개, 자두 2개를 싼 비닐봉지를 건네주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배려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주머니를 뒤적여 어린아이 기저귀 값이나 하라며 3만원을 쥐어주고 고마운 정을 대신했다.

 

  어제의 산행과 달리 오늘은 주로 아스팔트길을 따라 걸어야 했다. 일단 죽전까지만 나가면 그 다음은 따로 길을 묻지 않고도 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곳까지 가는 길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 길을 나다니는 사람들이 적었지만 눈에 띄는 대로 길을 물었다. 에너지관리공단을 지나쳐 롯데마트 앞을 거닐었다. 수지구청을 경유하여 하이마트, 문정중학교 등이 지나는 길에 널려 있었다.

 

  산길과 확연히 다른 것 하나가 느껴졌는데 지나치게 신호등이 많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사이에 난 신호등을 과연 다 지켜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대로변과 달리 그곳에서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자체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엉뚱한 데서 시간을 다 소비할 것만 같았다. 부지하세월에 내맡기기에는 갈 길이 너무나 멀었다. 산에는 빨간 불이 없다는 사실이 무슨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생각되었던 것이다.

 

  풍덕천 사거리를 지나 이마트(죽전) 앞에 이르니 7시 35분이었다. 신갈쪽 길을 향해 건너가는 데도 마치 신사동에서처럼 헷갈려 다소 시간을 축냈다. 40분쯤 되니 내가 근무하는 단국대 건물이 시야로 빨려 들어왔다.

 

  웬 술집인지 음식점인지 모를 건물 앞에 등의 갓을 노란색 주전자를 뒤집어 거꾸로 매달아 놓은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앞으로 가다 한 번 더 그와 같은 모습을 발견하였는데 상호가 같은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그 집의 특징인양 싶었다.


  7시 45분께 보정역 근처 한 마트에서 캔 커피로 모닝커피를 대신하고 신갈쪽을 향하여 다시 걸었다. 8시가 조금 넘었을 때 보정교차로가 나왔는데, 아뿔사 그곳에서 수지구청 쪽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었다. 제대로 길을 잡았다면 상당 부분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달프다더니 이는 완전히 그 꼴이었다.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면 그런 실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으련만 죽전부터 확실히 길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그런 생각을 할 기회를 아예 차단해버린 셈이었다.

 

  보정교차로를 지나자마자 바로 이마트(구성)였다. 걸어서 불과 1시간 30분 남짓한 거리에 세 개의 이마트를 목도한 셈이다. 출발할 때의 수지 쪽 이마트, 죽전 이마트, 구성이마트가 바로 그것이다. 거대한 자본의 힘이 어쩌면 이곳에 그렇게 집중되어 나타나게 되었을까? 조금씩 장소는 달리 하고 있지만 각 이마트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싸다는 선전 문구는 천편일률적으로 걸려 있어 오가는 사람들을 빨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8시 20분 마북 삼거리를 지났다. 한국전력기술(주) 건물이 옆을 비켜 간다. 신갈 쪽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구성으로 접어드니 얼마 안 되어 서울우유 용인공장이 눈 위로 떠오른다. 6분 뒤 수령 450년 된 느티나무가 앞을 막아섰다. 주변에는 커다란(211.5센티) 장승 모양의 석불입상이 비각에 몸을 가린 채 맞고 있다. 표지판은 그것이 미륵불로 구복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설명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비각 앞에는 여러 개의 비석들이 군락을 이루었다. 이른바 청덕비(淸德碑), 선정비(善政碑 ),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의 명목으로 세워진 것들인데, 알 만한 이름도 제법 있어 흥미로웠다. 현령 서명균(徐命均), 관찰사 김홍집(金弘集), 선혜 당상 민영준(閔泳駿), 현령 유봉휘(柳鳳輝) 등 대개 영조(英祖) 이후 활동한 인물들이 그나마 알 법하였다.

 

  머지않은 곳에 구성초등학교가 있는데, 민영환선생묘 표지판이 고개를 내민다. 거리가 80미터밖에 되어 있지 않으니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웠다. 길을 더듬어 찾아가다 보니 묘소를 발견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담장으로 둘러쳐 자물쇠로 잠겨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 묘소관리소가 옆에 있어 벨을 눌러보았지만 인기척이 없고 애꿎은 개만 낯선 얼굴을 향해 하릴없이 짖어댄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릴 수 밖에. 그러면서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못내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애국지사의 묘소를 철통같이 보호하는 것도 좋을지 모르나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여 그 숭고한 정신을 본받게 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용인향교 입구를 지나고(8시 53분) 마침 지나는 길에 떡집이 있어 맛있음직한 떡 하나를 사들고 다시 훠이훠이 길을 재촉하였다. 경찰대학 입구를 지나 아차지길 입구를 벗어나 어정가구단지로 들어서 어정마을에 이르렀다. 이곳 지명은 꽤나 토속적인데 그 나름대로 의미를 띠고 있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알고 있기로는 다음과 같은 전설과 관련이 있다. 충주에 사는 자린고비라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구두쇠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장항아리에서 장을 묻혀 가는 파리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자린고비는 그것이 아까워 얼른 바가지에 물을 떠가지고 파리를 뒤좇았다. 파리 다리에 붙은 장을 씻어오기 위함이었다고 하니 대단한 일이다. 그렇게 파리 뒤를 좇다가 아차지 고개쯤에 이르러 아차 하는 순간에 그만 파리를 놓쳤다던가. 그래서 생긴 지명이 아차지 고개란다. 그래도 아쉬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가 어정 어정대던 곳이 바로 어정이 고개라는 이야기. 아마 어린 시절 어머니께 들었던 것 같다. 사실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지금은 동백지구와 죽전 쪽 사이에 끼어 어엿한 가구단지로써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어정초등학교 앞을 지나니 일산에서와 마찬가지로 호수공원이 들어서 있다. 동백지구는 얼마 전부터인가 많은 새로운 건물들이 즐비하게 모양새를 이루게 되어 나날이 변모되는 모습이 보일 정도라. 그 숨통이라도 되는 양 호수공원이 우아하게 자리를 잡았는데, 호수 중앙에는 산울림이라는 상징물이 호수를 가르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몇 마리의 오리들이 자유롭게 유영을 즐기는 가운데 저쪽 한 쪽에는 두루미 한 마리가 상념에 잠겨 있다. 주변 사람들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호수 주변을 돌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심지어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는 사람까지 다양한 군상을 이루고 있다. 반겨줄 이 하나 없는 불청객이긴 하지만 나도 어엿이 의자 한쪽을 차지해 다리도 쉴 겸 아까 사든 떡 맛을 보았다. 제법 달콤한 맛에 여유롭게 지켜보는 가운데 앞을 지나던 사람이 벌써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얼굴을 보이다간 이내 뒷모습을 남긴 채 멀어져 간다. 어서 떠나라는 신호를 삼듯 주섬주섬 배낭을 꾸려 둘러매고 또 그렇게 가야만 했다.

 

  출발하며 시계를 들여다보니 10시하고도 5분이다. 어은목 마을, 초당마을을 지나갔다. 31분쯤 한국수출입은행 인재개발원을 지나다 잠시 멈칫했다. 누군가 내게 고개를 수그려 인사를 하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나쳐가던 사람이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 것을 이내 알아차리곤 고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웨스트민스터 대학원대학교 앞을 지나치는 데 누가 옆에 차를 대고 묻는다. 용인을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옳거니. 좋은 질문이었다. 내가 가는 방향이 바로 그쪽이니 그것쯤이야 쉽게 대답해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아는 것을 적시에 질문을 해올 수 있단 말인가.

 

  동백지구에서 용인으로 나오려다 보면 언덕길을 올라서야 하고 그것이 끝나는 지점에 플라타너스 길이 크게 원을 그리며 나있다. 물론 새로 난 길로 가면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 플라타너스 길이 끝나는 지점이 바로 신갈과 용인이 이어지는 용인대로인데, 그곳에 들어선 것이 11시 7분경이었다. 용인의 길을 걸으면서 자주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가 용인시청에서 내건 ‘세계최고 선진용인’이라는 문구였다. 과연 뭐가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럴 듯한 게 하나 보였다. 육교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노인과 장애인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목도 마른 참이라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들었다. 여간해서 길을 걸으며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편이었는데 웬일인지 오늘은 그게 별로 하찮은 일로 여겨졌다. 쭈쭈바를 빨며 가노라니 폭포정(瀑布停)이라는 음식점 간판이 눈앞에 들어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관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폭포가 멈춘다는 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아무래도 정자 정(亭)자를 쓴다는 것이 그만 실수로 정지할 정(停)자를 잘못 쓴 것은 아닐런지? 그렇더라도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여간 그런 억측을 해댈 뿐이지 시원하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바쁜 일정에 주인을 찾아가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용인시청이 바라다 보이는 반대편 쪽에 용인대입구임을 알려주는 상징물이 반긴다(11시 35분).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역산에게서 문자가 왔다. 반지설산을 반드시 등정한 다음 보자며 중국에서 보내온 것이다. 용인대 앞을 지나 학고개 터널까지는 계속 비탈길을 올라가야 했다. 12시에 학고개 터널을 통과하여 서울공원묘소앞을 가려는데 작은 뱀 한 마리가 놀라 지레 겁을 먹고 풀숲으로 달아난다.

 

  상덕(12시 21분)을 지나 40분쯤 미가오리마을이라는 음식점에 들어섰다. 아무래도 시장기를 달래야 했고 발도 피곤기를 꽤나 느끼고 있었다. 묵밥을 시켜 먹고 나서니 발걸음이 무겁다. 음식점을 나서자마자(오후 1시 12분) 얼마 안 되어 용인서리 고려백자요지라는 팻말이 눈에 밟혔다. 50미터밖에 안 된다고 하니 또한 언제 기회가 되랴 싶어 잠시 들리기로 하였다. 겨우 찾아가 보니 울타리를 쳐놓아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앞에 소개한 설명문을 통해 그것이 꽤 중요한 의미를 띄는 도자기 생산지였음을 알 수 있었다.

 

  도요지를 되돌아 나와 아스팔트길을 다시 걷는데 이번에는 사마귀 한 마리가 길을 막아선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더니 이는 가히 당랑거봉(螳螂拒奉)의 형국이라 할 만하다. 가볍게 사마귀를 따돌리고 주변의 냇가를 찾았다. 내쳐 걷느라 피로에 지친 발을 위로삼아 시원한 물맛을 보여주려니 탁족이 제격이었다.

 

  조금은 개운해졌지만 발의 피로도는 어제와 확연히 달랐다. 외식창업연구소(1시 50분) 앞을 지나 2시 5분에 서리 입구에 도달하였다. 외갓집 가는 길이 구불구불 오른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머지않은 거리일 테니 잠깐 들렀다 갈까 하는 생각과 다리가 피곤하니 그냥 갈까하는 생각이 교차하며 잠시 상념에 젖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아는 체를 하며 부른다. 이번에는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외사촌 동생이 차를 타고 가다 나를 본 것이다. 수인사를 대충 나누고 외갓집에 가보아야 출타중이라 사람도 없다고 하는 정보, 또 거기에 외사촌 동생도 만나보았으니 구태여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렇듯 문제는 엉뚱한 데서 풀렸다.

 

  천리 입구쯤에 오니 무슨 음식점 간판이 예사롭지 않다. ‘천리오리돌구이’라. 무슨 소리인가? 하여간 2시 30분경 천리에 도착하였다. 200리길을 미처 가지도 못했건만 천리를 지나게 된 것이다. 천리(泉里)는 다른 말로 샘골이라고도 한다. 옛날 외갓집에 갈 때는 이곳에서 걸어가야 했고 내도 건너야 했다. 어머니께서 나오신 용천초등학교를 지나, 제1천리교라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그러면 도대체 몇 천리교까지 있으려나? 거기에 정말 당혹스런 버스정류장 표지판. 천5리 - 천6리 - 덕성리. 참 꽤나 험난한 곳을 지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GS건설 기술연구소(3시 10분) 근처를 지나 이한응열사(李漢應烈士) 묘소 입구(500미터)에서 복숭아를 꺼내어 물었다. 다 먹고 가려니 한참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대로 들고 일어나 먹으며 걷기로 하였다. 위험이라 쓰인 광케이블표시 표지판에 위험을 아는지 모르는지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장수방 교수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한가위 잘 보내라는 내용의 문자를 확인하고 답장을 한 뒤 고개를 드니 앞의 음식점 이름이 장수촌(유황오리집)이다. 졸지에 두 장수가 출현하였으니 기운 좀 내보자.

 

  금방 나타나리라 여겼던 송전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송전 입구인 송전 2교에 이르니 난간에 깃발이 무성하게 꽂혀 나부끼고 있었다. ‘화장터결사반대’라는 서슬이 시퍼런 문구가 아로새겨져 무슨 사연인가를 짐작케 해준다. 4시 13분 마침내 송전에 들어섰다. 기념으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물었다.

 

  갈림길이 선택을 강요한다. 한쪽은 오산, 남사요, 또 한쪽은 평택, 안성이다. 해답은 뻔하였다. 절대 여기서 오산할 내가 아니잖은가. 용인시 공설공원묘지(4시 35분) 앞을 지날 때는 이동저수지 모습이 뚜렷이 다가왔다. 물고기가 살찐다는 어비리(魚肥里 : 4시 41분)를 지날 때 아내가 전화를 걸어왔다. 마침 배터리가 다 닳아 교체할 때가 되어 전화는 중도에 끊어졌다. 4시 50분경 마침내 고삼을 지칭하는 표지판이 처음으로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아침 새벽같이 용인에서 출발하여 아직도 용인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5시 30분. [웰컴 투 안성(영어). 어서 오십시오 경기도 안성입니다..] 라는 표지판이 인사를 한다. 와 안성이다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되었다. 이제 이 길도 완성의 단계에 접어듦을 알리는 신호탄임에 틀림없으리라.

 

  양성면 난실리에 이르렀다. 문화마을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다작 시인으로 유명한 조병화시인의 고향인 데서 비롯된 말인 듯싶었다. 실지로 ‘우리 난실리’라는 조병화 시인의 작품이 돌에 새겨져 있었고, 조병화문학관도 있다. 무슨 비각인가가 길옆에 있어 잠깐 들렀더니 ‘전주유씨열녀정문’이었다. 진위천에는 난실교가 내를 가로질러 걸려 있었다. 진위천의 이름으로 보아 고불 맹사성에게 혼이 나 인장이 못에 빠지는 것도 모르고 도망갔다는 진위현감의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6시 30분 미리내 성지 입구(4킬로미터)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염티마을 입구를 지나 방고개로 향하였고 고삼면 경계에 이른 것은 6시 49분이었다. 어둠이 짙어오고 있었지만 큰길인 관계로 헤드랜턴을 꺼내지 않아도 되었다. 사실 배낭에는 헤드랜턴 뿐 아니라 비닐우산도 준비되어 있지만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것 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록 쓰지는 않았으나 비상시에 쓸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 그것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옛날 같으면 몹시 겁이 났을 어둑한 외딴 길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별로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못하는 노래나마 불러보기도 하고 휘파람을 불기도 하면서 호젓하게 길을 가노라면 가끔씩 차량들이 지나갔고 그럴 때면 잠시 가장자리 풀 섶으로 비켜서곤 했다. 반딧불이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지나간다. 참으로 오래 만에 대하는 녀석이라 더욱 반가웠다. 그래도 아직 여기는 청정지역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증좌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큰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했을 게 뻔한 그런 전화였다. 어디쯤 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7시 17분 고삼 농협을 지나쳤다.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7시 40분이었고 아내와 아이들은 먼저 집에 와 있었다. 오늘 늦게 서울서 떠났건만 문명의 이기는 그들을 먼저 도착하게 하여 나를 환영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어제 서울을 출발하여 조카 집에 갔을 때 13시간이 걸렸는데 오늘도 용인 수지를 떠나 고삼 집까지 오는 데 13시간이 걸렸다. 이로써 이틀간의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금의환향은 아니지만 내게 있어 도보환향은 나름대로 큰 의미가 되어줄 것이다. 이 길이 아니라도 앞으로 우리에게는 가야 할 길이 길게 드리워져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