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및 여행기/오십보백보

< 북악터널에서 우이동까지 >

지평견문 2014. 2. 7. 06:30

 

     < 북악터널에서 우이동까지 >

 

     2014129(수요일) 맑음

 

1015분 후암동 집을 출발하면서 종점에서 김밥 하나를 사 배낭에 구겨 넣었다. 버스를 갈아타며 북악터널 앞에 이르니 벌써 시침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침부터 서둘렀어야 했는데 하는 일말의 후회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북악정이라는 음식점 앞을 출발하여 평창동 길을 통해 북한산을 향하는 데 무슨 드라마촬영이라도 하는 지 SBS차량이 여러 대 눈에 띄었다. ‘열애라는 작품을 촬영한다는 사실을 대충 알아차리고는 이내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계단을 오르니 또 계단이 펼쳐졌다.

 

모처럼만에 평창공원지킴터를 지났다(1213). 평일이라 그런지 등산하는 사람이 오다가다 한둘 보일 뿐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어떤 때는 앞뒤로 한 사람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란 혹 이런 것을 두고 이르는 것은 아니던지. 어디에선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듯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지나가는 바람에 나뭇잎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거기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1250분경 일선사(一禪寺)에 도착했다. 등산객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 전화하는 모습이 창공을 배경으로 클로즈업된다. 절을 둘러보는데 보살 한 분이 내 쪽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굽히며 합장을 하였다. 얼떨결에 두 손을 모아 멋 적게 답례를 했다. 남산만한 배를 한껏 내밀고 있는 포대화상에게 잠시 눈길을 던지고는 이제 배를 채울만한 곳을 물색하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언젠가 갔던 곳으로 기억되는 장소 하나가 여봐란듯이 시야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는 데 어찌 북한산이라고 다를 턱이 있겠는가? 못이기는 척 다리쉼도 할 겸 맞춤한 자리 하나를 찾아 냉큼 등산 가방을 내려놓고 본다. 종점에서 산 김밥을 호일을 벗겨 가며 분별없이 탐하노라니 부러울 게 없다(오후 110). 사람[]이 산()에 가면 어느 정도는 신선[]이 되게 마련이다. 최대한 마음을 안온하게 갖고 여유를 즐기며 자그마한 행복을 탐닉해보는 것이다.

 

혼자 산행을 하자니 점심시간이 길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가고 쉬는 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니 그게 단독산행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었다. 대성문(大城門)에 다다르니 135분이 되었다. 한때 12성문을 돌아보던 기억도 새로웠다. 성곽을 따라 거니는 데 응달에는 눈이 녹지 않아 제법 미끄러웠기에 어떤 구간은 아이젠을 반드시 착용해야만 했다. 전망이 좋다 싶으면 가끔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고 그곳이 어디쯤인지 가늠해보는 것도 산행의 별미이다.

 

158분경 보국문(輔國門)을 거쳐 대동문(大東門)에 이르니 212분이 되었다. 대동문의 편액은 숙종(肅宗)의 어필을 집자한 것이라고 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숙종하면 장희빈을 떠올리곤 하는 데 드라마 영향이 큰 탓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숙종은 40여 년간 왕위를 누리면서 여러 가지 볼 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광해군 때 처음 실시하기 시작한 대동법이 완성된 게 숙종 때이고 우리나라에서 화폐가 활성화되는 것도 바로 숙종 때였다.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진 것은 물론이고 단종과 사육신의 복원도 숙종 때 일어난 일이고 보면 그리 녹록한 임금이 아니었음 알 수 있다.

 

지금 지키는 장수는 없지만 동장대(東將臺)가 그 수려한 모습을 성벽을 끼고 나타났다(227). 사실 북한산성을 숙종 때 축조하였지만 이곳에서 전쟁을 수행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산성을 쌓느라 동원되었을 민초들의 땀방울이 배었을 곳을(물론 지금은 대부분 복원된 것이지만) 편안히 감상하며 지나자니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용암문(龍巖門)을 지나면서(258) 백운대까지 왕복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백운대는 올라갈 염두도 내지 못했는데 막상 산행을 하다 보니 가능성이 열렸다. 아마 평일이라 등산객 많지 않아 병목현상을 피할 수 있었던 탓도 있지 않았나 싶다.

 

주로 위문(衛門)으로 알려졌던 암문이 백운봉암문으로 명칭이 달라진 채 다가왔다(337). 나름대로 시간의 여유가 있다 보니 주저 없이 백운대를 오르게 되었다. 두 방향의 줄이 있어 올라가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이 혼선을 빚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올라서는 쪽으로 사람들이 내려오면서 일행 중 한 사람이 나보고 다른 줄로 올라오면 될 텐데 라는 말을 하였다. 웃음으로 받으면서 내려오는 줄이 반대쪽(우측통행)임을 밝히자 역시 일행 중 다른 한 사람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왔다.

 

백운대에 올라(352) 곁에 있는 분에게 부탁하여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내려왔다. 우뚝 솟은 인수봉이 옆으로 비켜 가고 있었다. 백운봉암문으로 되돌아와서부터 풀었던 아이젠을 다시 차고 이제 스틱까지 짚고 조심조심 하산을 시작하였다. 머잖은 곳에 백운산장이 자리하고 있었다(428). 암울했던 일제시기에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금메달을 땄던 손기정 옹이 쓴 白雲山莊이라는 글씨가 처마를 떠메고 있었다. 막걸리를 시켜 먹는 일부 등산객들을 보고 막걸리 한 잔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원래 혼자서는 술을 잘 안 마시는 데다 잔 잡아 권할 이가 없으니그냥 지나쳐 내려오기로 하였다.

 

계곡 물이 꽁꽁 얼어붙어 멋진 광경을 뿜어내는 모습엔 잠시 가던 길을 멈추어도 보았다. 산림천택이야말로 값없는 청풍과 임자 없는 명월과도 같이 사유화되어서는 안 될 것들 중의 하나여야 할 것이다. 경쟁력이라는 미명하에 함부로 민영화하는 것만이 대수는 아니다. 하늘이 부여한 자연의 혜택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누려야 함은 재론을 요치 않는다.

 

영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놓여있는 하루재 근처(454)에서 다시 아이젠을 풀었다. 도선사 쪽으로 내려가다 왼쪽으로 길이 하나 틀어져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길을 선호하게 되었는데 도선사 쪽 길로 내려서면 아스팔트길을 한참 걸어야 하지만 왼 쪽의 길은 거의 산책코스라 할 만큼 완만하면서 흙을 밟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1.5킬로 정도 그 길을 경쾌한 걸음으로 내려오다 보면 그 끝 지점에 백운대 2공원 지킴 터가 매달려 있다. 그 다음은 우이동 계곡을 끼고 내려오게 되는 데 가끔 멋진 소나무들이 특유의 아름다운 자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즐거움을 더해준다.

 

마침내 6시경에 우이동 버스정류장에 도착함으로써 오늘의 도보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12부터 오후 6시까지 6시간 정도를 소요해 안성에서 이어지는 도보여행의 지평을 확대하였다. 이제 언제쯤 다시 이곳을 출발점으로 삼아 북진하게 될 지 또 그 나름대로 설렘 속에 계획을 즐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