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및 여행기/오십보백보

후암동에서 북악터널까지

지평견문 2014. 1. 27. 08:07

 

    < 후암동에서 북악터널까지 >

 

     2014126(일요일) 맑음

 

     마침내 설렘은 시작되었다. 무슨 새로운 일을 하고자 하면 괜히 마음이 설렌다. 이제 우리 나이로 58세나 되었고 보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마음이 설렐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등산 가방을 간단히 꾸려 짊어진 채 855분 후암동 집을 출발하였다. 후암초등학교 앞의 남산 계단을 밟고 순환도로로 올라섰다. 이 계단은 너무 경사가 심하여 좀 위차 위차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부터 이곳에 엘리베이터 공사가 시작되었고 거의 완성된 듯한 구조물이 새 모습을 드러냈다. 순환도로에서 길을 건너서면 바로 남산도서관이다. 남산도서관 앞에는 두 개의 동상이 좌우로 나란히 서 있다. 좌퇴계 우다산이라고나 할까?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과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동상이다. 다산의 동상 앞을 지나 계단 길을 오르면 이번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기념관이 나타난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 이로움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이라는 안 의사의 강한 필치가 돌 위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안 의사 기념관 맞은 편 쪽에는 옛날 어린이회관, 중앙도서관으로 쓰이던 건물이 있고, 왼쪽 아래편에는 백범 김구 선생과 부통령을 지낸 독립투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남산은 그 주변에 수많은 동상들이 있는 편이다. 아마 이곳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곳보다도 동상이 가장 밀집된 지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일었다. 사실 남산은 아픈 추억의 역사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은 무슨 발굴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데 옛 식물원 자리는 일제시기에 신궁이 있었다고 하며 한때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4.19이후 끌어내려지는 치욕을 당했다고 한다. 생존한 사람의 동상을 만들었다는 자체가 생사당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것인 줄 어찌 몰랐을까? 하기야 광나루에서 이승만대통령이 낚시를 하다 방귀를 뀌니 신모 장관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며 아부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어 실소를 금하게 한다. '지당대감'이나, '예스맨'이니 하는 것이 어찌 옛날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겠는가? 지금도 대통령에게 직간하는 사람들이 없어 소통 부재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말들이 무성한 편이 아니던가. 일찍이 맹자는 '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는 것도 아첨이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 하는 것도 아첨'이라고 한 적이 있다. 기회를 엿보아 뭔가 얻거나 어떤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을 경계한 말인 듯싶다.

 

     이른바 삼순이 계단이라는 것을 내려서 순환도로를 따라가다 보니 '한양공원(漢陽公園)이라는 정체 모를 비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뒷면은 일부러 글씨를 쪼아버린 흔적이 있어 그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하였다. 뭔가 수상한 흔적으로 여겨지지만 현재로서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알 까닭이 없다. 어쨌든 케이블카 정류장 옆을 지나 다시 숭의여자대학과 리라국민학교를 지나면 애니메이션 센터가 나타나는데 아마 옛날 KBS방송국 자리가 아니었나 싶다. 한때 국사편찬위원회도 그 근처였는데 모시고 있던 교수님의 심부름으로 다녀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조금 지나면 적십자사 건물이 보이고, 곧 이어 세종호텔의 모습도 눈에 띈다.

 

     9시 반쯤 밝은 동네라는 뜻의 명동(明洞)에 들어섰다. 유도회 제자인 김모 군과 유도회 동기인 윤 피디에게 전화를 걸어 연결시켜 주었다. 어제 윤 피디가 한시 100여 편 정도를 번역할 사람을 구한 일이 있어 그 일을 성사시켜 준 것이다. 삼일로 창고극장 앞을 지나면서 보니 좌측으로는 명동성당이고 우측으로는 영락교회가 길을 건너 마주하고 있어 신구교의 묘한 대조와 조화를 동시에 이루고 있었다. 평화신문사 건물 벽에는 새로운 추기경의 탄생을 축하하는 플랜카드가 붉은 색으로 다가왔다. 인제대학 백병원의 모습도 보였다. 한때 인제대학은 강원도 인제에 있는 줄로 알았던 적이 있다. 나중에야 그것이 부산에 있는 사실을 알았고, 그 인제는 仁濟일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아마 의술과 관련되지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추측을 하게 되었다.

 

     청계천을 만나서면서부터는 짧은 구간이지만 천변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광통교를 지나면서는 잠시 물가로 내려가 기둥에 새겨진 글씨와 문양들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어느 때 준천했다는 사실을 표해주는 글씨가 아직도 선명했고, 조선 최초의 왕비의 능이었던 정릉(貞陵)을 옮기면서 가져다 썼다는 석물의 일부가 처연히 남아 있었다.

 

     동아일보 앞(105분경)에서 고종의 칭경각을 바라보고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 앞을 지났다. 충무공이나 세종 모두 훌륭한 분이지만 그곳이 세종로이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충무로에 있어야 하고, 세동대왕의 동상은 진작 그 곳에 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져보았다. 도로명과 달리 충무공의 동상을 그곳에 세웠던 것은 군인 통치 시대를 받쳐 줄 무인의 상징성을 돋보이게 한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경복궁 역 앞에서 길을 건너 경복궁을 오른쪽에 끼고 길을 걸었다. 청와대 근처에 가니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신문고를 상징하는 큰 북이 하나 걸려 있어 안내문을 읽어보니 김영삼 대통령 시절 이원종 서울시장이 기념물로 세웠다고 한다. 7궁 근처를 지나며 사진을 찍고 청운동 쪽으로 가는데 청와대 경비로 보이는 두 사람이 아는 체를 하였다. 혹시 사진을 찍었냐고 묻기에 사실대로 말했더니 7궁 부분은 군사시설이라 촬영이 금지 되었다고 하며 삭제를 부탁하였다. 아깝기는 하지만 그렇다는 데야 어쩔 수 없어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 컷을 바로 삭제하였다. 그런데 건널목의 적신호는 눈치 없이 그때까지도 바뀌지를 않았다. 조금 더 기다려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고장 난 것이라 자체 판단을 한 다음 차량 통행을 주시하며 길을 건넜다.

 

     경복고등학교와 청운중학교가 잇대어 나타났다. 1.21 사태 때 간첩을 막다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외솔 최현배 선생의 아드님이라고 했던 것 같은 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근처에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석이 보였다. 자하문이라고도 하는 창의문에 도착한 시간은 115분경이다. 그냥 맞바로 갔으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겠지만 가던 길을 멈추고 사진을 찍다 보니 자연 시간이 지체되었다.

 

     하여간 창의문(彰義門)이라고 하면 ()를 현창한다.’고 하였던 것인데, 이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산물이다. 명과 후금 사이에 중거리 외교를 통해 국익을 우선시 했다는 광해군은 정치적으로 대북 일변도의 편중된 정치를 하다 서인에 의해 실각된 사건이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이후 대북 정권은 와해되었고, 서남인 중심의 정국이 형성되는 가운데 소북이 잔존한 정도라고나 할까? 사실 서인과 남인의 붕당정치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인조 대 24명의 재상 중 21명이 서인 출신이라고 한다면 서인 중심의 정국이 꾸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나중에 예송과 환국정치를 통해 반전되기도 하지만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주류를 이룬 것은 역시 서인의 한 갈래인 노론 중심이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인조반정은 바로 그런 역사를 산생할 분수령이었던 셈이다.

 

     창의문을 지나 부암동을 내려가다 보니 이승만연구원이라는 팻말이 눈에 띄어 골목길을 접어드니 연세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인승만연구원의 간판이 보였다. 얼마 전 이승만 연구를 한 근현대사 전공자 한 분이 이승만 대통령을 세종대왕과 같은 부류라고 언급했다고 하는 말이 있었다. 눈과 귀가 의심될 정도의 놀라운 말인데 과연 그 말이 사실이라면 4.19때의 국민들은 세종대왕과 같이 훌륭한 인물을 하야시킨 셈이 된다. 최근 들어 세상을 시끄럽게 하였던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파동 문제도 비슷한 시각에서 출발한 것으로 심각한 역사 왜곡이 우려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큰 길로 나와 조금 내려가니 석파랑이 나타난다. 지금은 한낱 음식점으로 화하고 말았지만 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원래는 당시 권세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장동 김씨) 소유였는데 대원군이 이를 탐내서 일부러 고종을 머무르게 하여 안동 김문으로 하여금 울며 겨자 먹기로 바치게 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재미있는 일화임에는 틀림없다. 대원군의 개혁정치는 나름대로 볼 만한 것도 없지 않았으나 아들 내외와 권력투쟁을 하며 개방에 좀 소극적이었던 면이 부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석파랑에서 상명대학교 쪽으로 길을 건너 왼편으로 들어가면 시내를 끼고 홍지문(弘智門)이 들어서 있다. 냇가로는 오간수문이 걸쳐져 탕춘대성으로 이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 홍지문을 도성문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결부하여 이를 북문에 해당하는 ()’자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홍지문은 도성 밖 탕춘대성과 관련된 것일 뿐이다. 실지로 도성의 북문은 숙정문으로 그 원래 이름이 소지문(炤智門)이었다고 한다. 소지문은 동서남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과 짝하여 인의예지의 사단(四端)을 이루는데, 중앙에 있는 보신각(普信閣)()’까지 어울리게 되면 오상(五常)인의예지신의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그 전에 길을 지나다 춘원 이광수의 집터가 근처에 있다는 표지판을 본 적이 있어 마침 내친김에 둘러보고자 하였다. 표지판이 일러준 대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니 연립주택 앞에 춘원이라고 한글로 된 글씨가 크게 씌어져 있었고, 거기에 조화로 된 꽃다발이 하나 걸려 있었다. 이것인가 보다 하면서도 너무 싱거운 듯이 여겨져 주변을 배회하다가 택배 직원으로 보이는 분에게 물어보니 그게 맞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소설 개척자라는 명성과 함께 친일파라는 악명을 동시에 갖게 되었으니 인간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불행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해방된 조국을 그는 과연 감격시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해방이란 일반 사람들에게 동토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봄일시 분명할 텐데 정작 춘원(春園)’이라는 봄 동산에는 봄같이 여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엄중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이제 다시 발길을 돌려 진도를 나가야만 했다. 세검정 방향으로 가다 보면 좌측 벼랑 위로 소림사라는 절이 저만치 예쁜 자태를 드러내며 매달려 있다. 소림사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중국과 우슈이지만 이곳 소림사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언젠가 학교 일로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비구니 스님들이 거처하고 있었다. 머잖은 곳에 세검정이 시냇가 너럭바위 위에 덩그마니 모습을 드러냈다. 체구는 작지만 날렵한 맵시가 친근히 다가왔다. 그러나 아담한 모습과 달리 이름은 칼날처럼 예리한 인상을 풍기기에 족하다. 인조반정 당시의 공신들이 칼을 씻었다고 하여 세검정(洗劍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던가? ()을 바꾸는 일은 마상(馬上)에서, 또는 칼에 의해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수성(守成)은 문치(文治)에서 비롯되는 만큼 상호 존중하며 협의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권력 장악에는 형제자매는 물론 부자와 사제관계까지 무시되기 일쑤였다. 그러니 뜻있는 이들이 정계를 멀리함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정치의 무상함을 반추하며 시내를 따라 걷다 보니 우축에는 서울예술고등학교가 자리를 했고, 좌측 길 건너편에는 예능교회라든가 상명대 박물관이 눈에 들어왔다. 설렁설렁 두리번거리며 길을 갔어도 북악터널 앞에 도착한 시간은 고작 1240분밖에 되지 않았다. 다음에는 이곳부터 시작하여 북한산을 넘어 의정부 쪽으로 가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며 차를 타고 귀가하기로 하였다.

 

     아뿔싸! 이게 웬일. 1711번 버스를 타려고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교통카드가 없었다. 물론 지갑도 갖고 있지 않은 상태. 그렇다고 언젠가 길 가던 중 차비가 떨어졌으니 보태달라는 사람처럼 될 수도 없는 터. 아마 만약 몹시 지쳤으면 그랬을지도 모를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도 팔자려니 하고 집까지 다시 걷기로 했다. 온 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이 재미는 덜 했지만 터널로 통과할 수도 없으니 그 방법 외에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둘러맨 등산 가방에 초코파이와 귤 따위가 일말의 위안이 될 수 있는 정도였다. 이렇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 아니던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생긴 자그마한 실수는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보니 개천가로 들어가는 계단이 눈에 띄었다. 거참 잘 되었다 싶어 천변으로 들어가 조금 거닐다 맞춤한 돌덩이 위에 엉덩이로 걸터앉아 예의 그 초코파이와 귤을 먹는 참에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아니 집 사람이 웬 일로? 교회에 갔다가 마침 귀가하여 경동시장이나 같이 갈까 하여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아니 또 이런 수가? 구원 투수가 따로 없었다. 어느 때보다 반가운 목소리로 이실직고를 하여 읍소를 하니 차를 끌고 오겠다고 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현상이 거듭 이렇게 반복될 줄이야. 새옹지마라더니 딱 그 격이었다. 그래도 한 50년 이상을 살아왔건만 도대체 제대로 아는 게 무엇이던가? 소크라테스가 내가 안다는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라고 했다는데. 지천명은커녕 당장 내 눈썹도 바라볼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절실하게 느껴봄직 하지 않은가?

 

     집사람이 어렵사리 길을 찾아 극적(?) 상봉을 하였다. 그런데 웬걸, 거기에다 도시락까지 싸왔다고 한다. 초코파이 가지고 점심이 되겠냐는 것. 언즉시야(言則是也), 말씀인즉 옳은 데 차 안에서 불편하게 어찌 먹겠나 싶었다. ‘고맙긴 하지만 거추장스럽게 어떻게 먹겠냐며, 혹시 김밥이라면 몰라도라는 말을 토하자마자 집사람 왈, ‘김밥이에요라는 말로 너무 쉽게 응대하지 않는가? 으 잉! 메야? 일순 눈물이라도 왈칵 쏟을 만큼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졸지에 튀어나온 말이 열녀 났네.’라며 서로 웃고만 것이었다. 거기에 커피까지 곁들여 있었으니 금상첨화란 그것을 두고 이르는 말일 터였다.

 

     시장에 좀 같이 가자면 좀처럼 기꺼워하지 않던 무지몽매한 한 사내는 이때만큼은 아무런 불평 한 마디 없이 시장 통을 누비며 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물론 시장은 경동시장에서 중앙시장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이렇듯 나만의 도보여행의 재개는 그 막을 화려하게 열었다. 이제 이 갓 피어오른 설렘의 장을 어떻게 잘 꾸려나갈 것인가는 또 하나의 즐거운 숙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