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생각/정의(正義 )

열녀 최씨의 음덕

지평견문 2013. 2. 13. 05:36

                      〇 열녀 최씨의 음덕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5월의 한 기사가 눈을 끈다. 진주(晉州)의 향리 정습(鄭習)이라는 사람을 특별히 잡과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자는 예조의 청을 조정에서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정습이 나름대로 특혜를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순전히 그의 어머니 덕이었다.

 

    정습의 어머니는 영암(靈巖)에 사는 최인우(崔仁祐)라는 선비의 따님이었다. 그녀는 진주의 호장(戶長) 정만(鄭滿)에게 출가하여 슬하

에 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막내는 아직 포대기에 싸서 업고 다닐 정도로 어렸다. 고려 말 우왕 연간에 왜적이 진주에 쳐들어와 분탕질을

하게 되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은 일 때문에 서울(개경)로 가고 없을 때였다.

 

    적들이 마을에 난입하였을 때 그녀의 나이는 30여 세였고, 미모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는 여러 자식을 끌거나 업은 채 산속으로 도

망쳤으나 결국 왜적들의 추격을 받게 되어 잡힐 지경에 이르렀다. 왜적들은 칼날을 들이대며 협박하였지만 그녀는 나무를 끌어안고 항거하

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발버둥을 치며 왜적을 꾸짖으며

 

    “날 죽여라. 도적놈에게 더럽힘을 당하고 사느니 차라리 의(義)를 지켜 죽느니만 못하다.”

 

고 하면서 입으로 끊임없이 왜적에게 욕을 하다가 마침내 나무 아래서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왜적들은 두 명의 자식을 포로로 잡아갔고,

당시 정습은 여섯 살의 나이로 어머니 시신 옆에서 울부짖었으며, 막내였던 어린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 채 오히려 젖을 빨려고 엄마 품으로

기어들어갔으나 피가 입으로 가득 들어가 곧 죽어버리고 말았다.

 

    10여 년 뒤 도관찰사(都觀察使) 장하(張夏)가 조정에 보고하여 정문(旌門)을 명하게 되었고, 정습의 향리역을 면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

었던 것이며 그 후 정습은 풍수학을 배워 이 때(세종 때) 잡과 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라시대에 박제상이 왜에 가서 인질로 가 있던 왕자를 구해 보내고 그들의 회유를 받았을 때 “차라리 계림(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하여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인 일이 있다.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할 때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끝까지 왜적에 항거

하다 목숨을 잃었으니 박제상의 일과 관련하여 충(忠)과 열(烈)의 차이는 있으나 의(義) 앞에 목숨을 버린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하겠다.

 

    인류 역사상 많은 전란(戰亂)이 있었다. 그때마다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재앙을 받아야 했다. 전쟁은 모든 악을 정당

화시키는 괴물과도 같은 존재다. 전쟁은 이로움을 추구하는 극단적인 행위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야 할 수 없이 방어를

해야 하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상태에서 남을 죽여가면서라도 이익을 취하고자 함부로 총칼을 드는 것이 어찌 정당화되어서야 될 것인가? 국

익이라는 그럴 듯한 말로 포장이 된다 해도 역시 전쟁은 악 그 자체일 뿐이다. 있지도 않은 화학무기를 내세워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였을

때 또 다른 정습의 어머니와 같은 피해자가 과연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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