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
나처럼 시골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개구리가 알로부터 올챙이를 거쳐 개구리가 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지켜보게 된다. 우리는 어린 시절 논가에서 끈끈한 액체의 막 속에 수많은 개구리의 알들이 들어있는 것을 종종 보곤 했다. 어느 정도 시기가 되면 그것이 자라 올챙이가 되고 어느 순간 다리가 돋아나온다. 마치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바퀴가 튀어나오듯 다리를 달게 된 올챙이는 꼬리가 떨어져나가면서 완전한 형태의 개구리가 된다. 나비가 처음부터 나비로 태어나지 않듯 개구리도 처음부터 온전한 형상의 개구리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런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른은 어린이가 자람으로서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리는 재벌도 조상 중에는 누군가 가난한 시절이 있을 수 있고, 사회적으로 각광을 받는 인물들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들도 결코 갑자기 자고 일어나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오랜 무명시절의 피와 땀의 결실을 거두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그들은 그나마 획득한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출발점을 겸허히 돌아보지 않고 이를 망각할 때 추락하는 날개를 하나 달게 될 지도 모른다.
어달사궁(於達思窮)은 현달하게 되어도 곤궁할 때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성어이다. 개구리가 되어도 올챙이 적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구리가 되어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는 수많은 개구리 가운데 올챙이 적 생각을 할 줄 아는 개구리야 말로 가장 개구리다운 개구리로서 인정을 받게 됨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개구리가 되어서도 개구리답지 못하다고 하면 어디 그것이 진정한 개구리이던가?
올챙이 시절은 물속에서만 생을 영위했지만 일단 다리가 달리면 물을 벗어나 산야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게 된다. 올챙이에서 개구리가 됨은 형체 상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 밖으로 벗어남으로써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되고 그만큼 인식의 범위가 확대된다. 그래서 올챙이 적 시절은 우습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개구리가 완전히 물을 벗어나서는 곤란하다. 가끔은 올챙이시절 뛰놀던 물가에 돌아가 몸을 축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개구리가 양서류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는 것일 게다. 인간도 어떤 의미에서 양서류의 본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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